제 아무리'귀차니스트'라 할지라도 살랑거리는 봄바람이 마냥 집안에 틀어박혀 있을수만 없게 하는 요즘, 자리를 떨치고 일어나 한번 쯤 도심 속 골목길을 산책삼아 걸어봄이 어떨까. 오가는 차량과 사람들로 번잡한 큰 길을 피해 딱히 볼일이 없어도 나른해지기 쉬운 봄날 오후 따사로운 햇살을 맞으며 일단 한번 걷기로 마음먹고 나선 도심 속 골목길이 속칭'통신골목'과'야시골목'이다.
언제부터인가 휴대전화 대리점들이 들어차기 시작한 통신골목을 걷는 가장 큰 재미는 저마다 톡톡 튀는 색채의 간판을 읽어내려 가는 것이다. '싼폰나라' '무한공짜' '싼집 대통령'은 애교수준이다. '싼집 찾다가 열받아서 내가 차린 집' '가격 초전박살 폰값을 휘날리며' '괴로워도 슬퍼도 난 싸게 팔래요' 등 고객호소형에서 각종 패러디에 이르기까지 속웃음을 자아내는 이색간판이 즐비하다. '우리는 역사적 사명에 통골에 휴대폰을 팔러왔다'는 아마 가장 긴 이름인 듯 싶다.
어법과 띄어쓰기를 무시한 이들 간판은 이동통신3사의 고객확보 경쟁이 치열해진 만큼 그에 못잖은 무한경쟁의 속내를 드러내는 웅변이나 다름이 없다. 그래서 일까. 끼(?) 넘치는 간판을 읽을 때마다 행인은 청중이 된 느낌이다.
통신골목을 돌아서 갤러리존 약간 못 미쳐 왼쪽으로 난 좁은 길로 접어들자 입구의 전봇대 위 파란 바탕에 흰 글씨로 쓰인 작은 이정표 '야시골목'. 봄꽃처럼 예쁘고 새싹처럼 싱그러운 아가씨들을 빗댄 '여우'의 사투리인 '야시'들의 전용골목인 이곳은 이름 그대로 화사한 옷차림의 대학생과 직장여성들이 삼삼오오 짝지어 옷을 고르거나 네일아트를 받고 있다. 화려한 빛을 받고 있는 액세서리 가게에서 귀고리'팔찌를 고르는 아가씨들의 입가엔 활짝 웃음이 묻어난다.
원래 야시골목은 대구 아가씨들의 패션을 선도하는 옷가게들이 모인 의류전문 골목이었으나 몇년새 상권이 변하고 있다고 한다. 기존의 옷가게들은 점차 로데오거리로 옮겨가면서 최근엔 네일아트숍이 많이 들어서고 있다. 한 상인의 말에 따르면 경기침체의 영향을 타고 이 지역 임대료가 내려가면서 웬만한 기술만 익히면 작은 평수의 가게로 손쉽게 창업할 수 있는 네일아트숍이 인기를 끌고 있는 것. 적게는 5천원에서 많게는 1~2만원 정도 들이면'야시'들의 손과 발은 뭇 남성의 눈길을 사로잡는 매력 포인트로 변신이 가능하다. 평소 같으면 단지 도심 블록을 잇는 지름길에 불과하던 야시골목도 찬찬히 뜯어보니 나름의 변화를 겪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아직 주인을 만나지 못해'임대문의'란 네 글자만이 썰렁하게 있는 빈 가게들도 제법 눈에 띈다.
'야시'들의 가볍고 날렵한 발걸음이 지금보다 더 잦아지는 날을 기대하면서 막 골목을 벗어나려는 찰나 이국적인 가게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페르시아 피어싱. 좁은 가게 안에서 이란인 총각 케요마르즈(Kayoomars'31)씨가 손으로 만든 페르시아풍의 액세서리를 팔며 전통 피어싱을 해주고 있다. 그가 건네는 홍차를 마시며 조금은 낯선 이란의 이런저런 역사와 테헤란시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글로벌시대를 사는 요즘은 지구촌 저 먼 곳의 사람들도 우리네 이웃이 될 수 있음을 도심 속 골목길을 찬찬히 걷지 않고서야 어찌 알 수 있으랴. 이 봄이 가기 전 이란인 총각이 즐긴다는 맥주 한 잔을 해도 좋겠다.
우문기기자 pody2@msnet.co.kr
사진 정재호기자 newj@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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