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사한 봄기운이 느껴지는 지난달 17일 대구시민운동장 야구장. 오는 6월 전남 광주에서 열리는 제37회 전국소년체전 중등부 야구 예선전이 열리고 있는 현장이다. 타자석이 바로 보이는 야구장 기자실에서 어린 선수들을 주시하는 이가 있었다. 작은 키에 단단해 보이는 몸, 까무잡잡한 피부의 이 중년 남자. 행여라도 선수들의 동작을 놓칠까 투구와 타격, 주루 동작 하나하나를 바라보는 눈초리가 매서웠다. 장효조(52). 야구팬이라면 잊을 수 없는 이름. '타격의 달인' '안타 제조기' '부챗살 타법' 등 그를 수식하던 말은 신화가 됐다. 장효조는 이제 삼성 스카우트로 선수 발굴에 힘을 기울이고 있다. 1988년 12월 구단의 전격적인 트레이드로 롯데에서 선수생활을 접어야 했던 그는 이렇게 다시 삼성인으로 대구와의 연을 이어가고 있었다.
◆대구와의 인연은 이어진다
-삼성으로 돌아오셨군요.
"2000년도에 2군 코치로 1년 정도 있었습니다. 스카우트 일은 2005년부터 해왔죠. 1992년 롯데에서 은퇴 후 타격 코치 생활을 6년 정도 했어요. 미국(보스턴 레드삭스 구단)에서 1년간 야구 공부도 했습니다. 앞으로 지도자 생활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삼성에서 코치로 1년간 있다가 2001년 목포 대불대에도 잠시 몸 담았었습니다. 이후로 3년 정도 공백이 있었던 것 같군요."
-사업은 안 했나요? 노래방을 했다는 소문이 있던데요?
"사업은 안 했습니다. 누가 그래요? 허허. 아니에요. 그런 적 없어요. 요즘 이상한 소문들이 많이 도니까. 근데 그런 소문이 어디서 나왔죠? 그렇지 않아요. 잘못 알려진 겁니다."
-공백기에는 무엇을 했나요?
"여행을 많이 했어요. 마음을 비운 상태로 여기저기 돌아다녔죠. 해외에도 자주 갔다 왔어요. 4, 5년 정도 쉬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가장 아까운 시간이네요. '자중하면서 지내자. 남들에게 부탁하거나 하지 말자'고 다짐했던 것 같아요. 아마도 자존심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군요. 삼성에서 은퇴했으면 한국시리즈만 4회 진출했으니 좀 더 화려한 은퇴식도 가능했을 겁니다. 모 신문사 국장이 야구 칼럼을 부탁해 관전평을 쓰면서 다시 야구장으로 돌아왔어요. '진작 했어야 하는데…' 하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요즘은 배트를 잡을 기회가 없지요?
"코치도 아니고 1년중 반 이상을 선수 보러 다니기 때문에 거의 만질 일이 없어요. 매년 11월 열리는 상경전(상원고와 경북고 정기전)에서 옛 (고교) 유니폼을 입거나, 중·고교 팀에서 요청이 있을 때 한 번씩 휘두르지요.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유니폼을 입어왔으니 야구계에 남지 못하면 누구든 미련이 남을 겁니다. 그래도 저는 야구판에서 있으니 기분이 좋아요. 야구인은 야구장에 있는 것이 가장 쉬운 일이고 보람도 있지요."
-감독이 되지 못한 것이 성격 탓이라고 하던데요.
"선수 생활 은퇴 후 감독을 맡는 이들이 있는데 성공하는 경우도 있고 실패하는 사례도 있습니다. 감독이란 것이 인생을 포함해서 경륜이 필요한 자리인데 하고 싶다고 다 되는 건 아니죠. 개인적으로 기술은 물론 철학적으로도 되든 안 되든 얼마나 준비를 하느냐의 문제인 것 같습니다. 성격에 대해서는 주위 얘기를 들어보니 '문제가 있었구나' 했어요. 좋지 않았던 부분이 있었으니 고쳐야겠다고 생각이 들더군요. 장점은 물론 살리고요."
◆대구 고교야구, 투지가 부족하다
-스카우트로 활동하면서 느끼는 야구계, 어떤가요?
"대구 청소년 야구가 문제입니다. 중학교보다 고교야구가 더 심각한데 서울 등지의 대회에서 우승 못 한 지가 7, 8년 됐어요. 대구가 야구 자존심이 있는 도시인데, 선배로서 일말의 책임을 느낍니다. 야구에 대한 열정이나 투지도 많이 떨어진 것 같고요. 제가 한국 나이로 스물아홉에 프로생활을 시작했어요. 요즘엔 선수 수명이 늘었는데 오히려 30세가 안돼 '노장' 소리를 들어요. 타격은 30대가 돼야 비로소 기술적·정신적으로 눈을 뜨는데 말이지요. 나이가 많아서가 아니라 기량이 떨어져 도태되는 겁니다. 선수 발굴할 때는 인성을 중요하게 봅니다. 고교, 대학 시절에 기량이 뛰어나도 인성이 제대로 안 잡혀 있으면 나중에 다시 빗나가는 경우가 많아요. 야구를 천직으로 여기며 열심히 하는 선수들을 뽑아도 성공 확률이 절반에 불과한데…. 요즘엔 밖에 유혹도 많잖아요? 학교 앞에 나서면 온통 술집이고, 그러니 정신적으로 무장이 되지 않으면 누구나 흔들릴 수도 있는 상황이니까. 그런 학생들을 야구 선배로서 지켜 볼 수밖에 없어 안타깝습니다. 학생다우며 기본이 착실한 선수가 좋습니다."
-1983년 데뷔때 신인상을 못 받았더군요.
"당시 제도의 허점이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시기적으로 안 좋았지요. 요즘처럼 인터넷이 있어 팬들이 항의할 수도 없는 시절이었잖아요. 당시엔 섭섭한 마음도 있었지만 지금은 어쩔 수가 없었다고 생각해요. 기록이야 더 많을수록 좋지만 달성 과정이 더 중요하잖아요. 기록은 기록일 뿐이지 않나요? 미국 메이저리그에서도 최우수선수상 말고는 다른 상이 없어요."
-선수 시절 가장 아쉽거나 후회되는 것이 있나요?
"야구 선수로 할 수 있는 것은 다해 봤는데 소속팀 우승만 못해 봤어요. 한국시리즈만 4회 나갔는데 비통한 마음마저 들었습니다. 팀에도 미안한 마음이 들어요. 이 마음은 평생 갈 것 같아요. 그래서 팀 전력 향상을 위해 애착과 애정을 갖고 선수 발굴에 힘쓰고 있습니다. 2005년 삼성라이온즈가 우승했을 때 유니폼은 안 입었지만 감격스럽고 흥분됐습니다."
◆야구인으로서의 자존심
-이호성 선수 사건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한때 유명했던 선수라 유난히 부각된 면이 있습니다. 팬들로부터 사랑을 받았으니 그 정도는 감수해야겠지요. 그러나 '인간'이라면 누구에게나 닥칠 수 있는 상황이잖아요. 이로 인해 안 그래도 침체해 있는 야구계가 이미지까지 나빠지지는 않았으면 좋겠어요. 주변에 질문하는 사람이 많은데 대답하기 곤란하더라고요."
-은퇴 후 적응하기가 어려웠을 것 같아요.
"당연히 안 되겠죠? 한 분야에서 10년 넘게 있었는데 새로 시작하면 또 그만큼 노력을 들여야 한다는 건데, 성공할 확률이 희박하죠. 사회에 대해서 잘 모르기 때문에 더 그렇습니다. 사람들이 '돈 많이 모아두지 않았을까' 생각하는데 당시는 재테크라는 걸 몰랐습니다. 관리할 만큼의 목돈도 없었어요. 야구는 열정적으로 하고 연습도 많이 했지만 나머지 부분은 너무 소홀히 한 것 아닌가 싶군요."
-먹고 살아야 한다는 걱정도 들었겠네요?
"왜 없었겠습니까? 아버지로서, 남편으로서, 가장으로서 책임을 다해야 한다는 생각이 유난스러웠습니다. '내가 움직여야만 가정이 움직인다'는 생각에 스트레스도 많이 받았지요. 그렇다고 아무 일이나 할 수도 없는 입장이고, 해서도 안 되지요. 홈쇼핑 채널 같은 곳에서 제의도 있었지만 모두 거절했어요. 저는 후배들에게 늘 말합니다. '마지막까지 야구인으로서 자존심은 있어야 하지 않느냐?'고요. 지금 생각해 보면 안 하기 잘한 것 같아요. '지금까지 내가 해온 것하고 돈하고 맞바꾸기에는 너무나 아깝지 않은가' 생각했습니다."
조문호기자 news119@msnet.co.kr 사진·정운철기자 woon@msnet.co.kr
▨ 장효조 선수는=1956년 부산 출생. 삼덕초교 3년 때 야구 시작. 대구상고(현 상원고) 고교 2학년 시절인 1973년 황금사자기 결승전 우승을 이끌었다. 1975~1978 한양대 시절 타격상을 거의 휩쓸었다. 1983년 삼성 라이온즈에서 프로 생활을 시작한 뒤 통산타율 0.331, 타격왕 4회, 출루율 1위 6회 등으로 한국 프로야구 사상 불멸의 기록들을 남겼다. 1988년 김시진과 함께 롯데 자이언츠로 전격 트레이드돼 1992년 선수 생활을 마감했다. 2005년부터 삼성 라이온즈 스카우트로 활동하고 있다. 현재 부인과 함께 부산에서 살고 있으며 외아들이 영국에서 목자의 길을 걷고 있다.
댓글 많은 뉴스
권영세 "이재명 압도적 득표율, 독재국가 선거 떠올라"
이재명 90% 득표율에 "완전히 이재명당 전락" 국힘 맹비난
이재명 "TK 2차전지·바이오 육성…신공항·울릉공항 조속 추진"
전광훈 "대선 출마하겠다"…서울 도심 곳곳은 '윤 어게인'
이재명, 민주당 충청 경선서 88.15%로 압승…김동연 2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