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김중기의 필름통] 눈부신 4월의 꽃을 보며

앞산 순환도로 옆 옛길에는 벚꽃이 만개했다. 길가에 나앉은 노란 개나리와 담장 너머 보이는 하얀 목련이 어우러져 앞산 옛 길은 꽃길이 됐다.

40대는 모두 우울증 환자라는 말이 있다. 20대의 뜨거운 열정도 식고, 치달아온 30대의 역동도 꺼져 이제는 과거의 회한과 가지지 못할 미래만 남아 있는, 마치 수분을 잃은 꽃처럼 느껴지는 세대다. 꽃들을 보면서 묘한 슬픔이 밀려오는 것도 결국은 시들고 길에 밟힐 것을 알기 때문이다.

4월의 눈부신 꽃을 보면서 떠오르는 영화가 있다. 짐 자무시 감독의 '브로큰 플라워'(2005)이다.

돈 존스턴(빌 머레이)은 독신남이다. 삶에 대한 의욕도 꺾이고, 새로운 만남도 갖지 못한 채 무료한 일상만 죽이는 인물이다. 어느 날 익명의 편지가 날아온다. 19살짜리 아들이 자신을 찾고 있다는 내용이다. 나에게 아들이 있어? 도대체 누구와의 관계에서 낳은 아이지? 그는 흘러간 과거를 더듬으며 지나간 여인들을 찾아간다.

짐 자무시 감독은 특유의 나른함으로 영화를 끌어간다. 빌 머레이가 뿜어내는 우울한 연기는 그가 한때 코미디 전문 배우였기에 더욱 역설적인 힘을 갖는다. 샤론 스톤, 줄리 델피, 제시카 랭, 틸타 스윈튼, 프란시스 콘로이 등 쟁쟁한 여배우들이 그의 옛 여인들이다. 우울한 현재와 달리 그의 화려한 과거를 보여주는 라인업이다.

지난 과거와 오지 않은 미래, 있는 것은 현재뿐이라는 것은 누구나 알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현재에 충실 한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기력 없이 살던 그가 처음으로 행장을 챙겨 길을 떠나는 것도 과거의 노크 때문이다.

이 영화에서 재미있는 것은 꽃이 가지는 의미들이다. 그의 거실에는 시들어가는 꽃만 있다. 바짝 말라 결국에는 바스러질 그의 모습이다. 젊었던 과거에 대한 그리움일까. 그는 옛 여인들의 찾아다니며 늘 싱싱한 꽃을 사들고 문을 두드린다.

그러나 그 꽃들은 쓰레기통에 들어가기도 하고, 무덤에 헌화되기도 하고, 뜻하지 않게 돌려받기도 한다. 그리고 여인들에 의해 내팽겨 치기도 한다. 재미있는 것은 거실에 있던 시들어가는 꽃과는 달리 비록 꺾인 꽃, 브로큰 플라워더라도 그 꽃들은 싱싱하다는 것이다.

영화는 그가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 것으로 끝이 난다. 변한 것도 없다. 길에서 몇 몇 아이들을 만나지만 그의 아들이라는 제시도 없다. 여전히 추리한 추리닝 차림으로 소파에서 쪼그려 자다 아침을 맞는다.

그래도 그의 심장은 싱싱한 시그널을 맛보았다. 과거로의 여행이지만 그것은 과거가 아니라 현재였다.

"과거는 흘러갔지. 나는 그걸 알아. 그리고 미래는 아직 도착하지 않았으니, 우리가 가진 것은 현재뿐이야"

곧 쓰러질 꽃을 볼 것이 아니라 싱싱한 현재를 즐기고 흔들어 깨우는 것, 그것이 짐 자무시가 하고 싶었던 것 아닐까.

김중기기자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