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슈퍼카 투어' 참가차 대구 온 사진작가 김중만

단 한명이라도 나와 통한다면…난, 그를 위해 찍겠다

사진작가 김중만(54)과의 인터뷰는 쉽지 않았다. 언론에 대한 혐오감이나 거리감 때문이 아니었다. 광고나 영화처럼 돈 될 만한 일거리에는 몸을 아끼지 않고 내던지면서 인터뷰 요청에는 '신비주의'랍시고 손사래를 치는 것도 모자라 몸까지 부르르 떨어대는 어쭙잖은 엔터테이너도 아니었다. 그는 지난 2006년 11월 '작가 선언'을 했다. '당대 최고의 상업 사진작가'라는 머리말과 결별을 선언한 뒤 명함과 휴대폰을 없앴다. 그런 그가 대구에 왔다. 대구 엑스코에서 열린 '김중만과 함께하는 월드 슈퍼카 코리아 투어'에 온 것이다. 주최 측 관계자를 통한 인터뷰 요청에 그는 '점잖게' 거절 의사를 밝혔다. 그는 피곤하다고 했다. 컨디션이 좋지 않다고 했던 것도 같다. "빡빡한 일정이지만 잠시 대화는 가능할 것"이라며 은근히 가능성을 내비친 관계자의 말만 믿고 행사장을 찾았다.

◆나는 사진기 기능도 다 모른다

예정된 팬사인회 시간에 맞춰 그가 나타났다. 이제는 상징처럼 되어버린 레게 파마머리를 한 채 조금은 수줍은 듯 탁자 앞에 앉아 팬들이 내미는 사진첩과 대형 슈퍼카 사진 위에 정성스레 사인을 해주었다. 잠시 숨을 돌리는 사이 인사를 나누고 첫 질문을 던졌다. 분명 인터뷰를 사양했지만 오히려 그는 예상했다는 듯 흔쾌히 답해주었다. 행사 성격에 맞춰 던진 첫 질문은 다소 엉뚱했다. "무슨 차를 타세요?" 생각에 잠기던 그는 "랭글러(크라이슬러 지프) 타다가 코란도로 바꿨다가 다시 랭글러를 탔어요. 지금은 포르쉐 4S를 탑니다. 원래 60세가 되면 타려고 했는데…." 부러움의 탄성을 내지른 기자에게 그는 겸연쩍은 듯 설명을 보탰다. "제가 기계를 잘 몰라요. 이 차도 포르쉐 측에서 리스로 싸게 준 거예요. 이럴 줄 알았으면 더 일찍 타는 건데.(웃음) 워낙 기계와 안 친해서 사진기도 기능을 다 몰라요." 당대 최고 작가로 꼽히는 김중만이지만 그는 최고 장비만을 고집하지는 않는다. 지난 2005년 카메라폰으로 찍은 사진으로 전시회를 열기도 했다. 700만화소 카메라폰으로 찍은 작품에 대한 반응은 이랬다. "이거 다른 카메라로 찍은 거 아니에요?"

직접 차를 몬다는 그에게 던진 두번째 질문. "약속 장소에 도착했는데, 좋아하는 음악이 흘러나오면 음악이 끝날 때까지 기다립니까?" 오히려 이번 질문에는 전혀 주저함이 없이 대답했다. "아뇨. 약속 장소로 갑니다. 음악은 또 들으면 되니까요. 하기야 지금 듣는 음악이 늘 같은 거라서. 저는 얼터너티브 록을 좋아하는데, 요즘은 '더 프레임즈'(아일랜드 더블린 출신의 얼터너티브 팝/인디록 밴드)만 듣습니다."

다시 사인회가 시작됐다. 쉴새없이 터지는 카메라 플래시를 맞으며 그는 무슨 생각을 할까? '컨디션이 좋지않다'는 말이 거짓처럼 느껴질 정도로 그는 열정적으로 임했다. 레게 머리에 검게 그으른 얼굴, 그와는 대조적으로 더욱 환하게 보이는 은빛 귀고리, 그리고 굵은 손마디에 끼어있는 '엄청나게' 큰 반지. 그의 과거를 떠올리며 그저 아프리카풍이라고 짐작할 뿐이다. 광택이 없는 검은 정장을 차려입은 모습은 얼핏 야수 같은 느낌을 주기도 했고, 삐딱한 반항아 기질도 엿보였다. 하지만 시종일관 미소를 잃지 않았다. 오히려 함께 사진 찍기를 원하는 팬들과 얼굴을 나란히 한 채 수줍은 듯 웃어보였다. 팬들의 이름을 두번 세번 다시 물었고, 다소 서툰 필체지만 또박또박 'For (팬 이름) 김중만'이라고 쓴 뒤 특유의 사인을 해주었다. 가방, 학생증, 카메라 뒷면, 필름통까지 사인 공세 속에 쏟아졌지만 전혀 싫어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피곤한 게 문제가 아니죠. 이런 사랑 속에 저 역시 존재하는 것 아닙니까?"

◆삶의 원칙은 없지만 분명한 선을 긋는다

작품 사진을 배경으로 포즈를 취해달라고 부탁했다. 사실 그는 자신이 가장 찍기 싫은 것은 '나 자신'이라고 말한 적이 있었다. 사진 찍히고 포즈 취하는 게 끔찍하게 싫다고도 했다. 하지만 그는 주저없이 일어서서 작품 앞에 섰다. 다시 플래시가 쉴새 없이 터졌다. 카메라 앞에 선 그는, 뭐랄까 마치 수줍은 소녀를 연상케 했다. 어떤 작가보다 피사체(인물을 포함한)의 자연스러움을 훌륭하게 포착해 낸다는 그였지만 스스로 피사체가 된 상황은 여전히 낯설고 어려워 보였다. "나를 대상으로 작품 사진을 찍는 것도 아니고, 그저 팬들이 내 모습을 담고 싶다고 하니까 자세를 취하는 거죠. 인터뷰하면서 평생 딱 한번 사진기자에게 '이렇게 찍으면 좋겠다'고 주문한 적이 있습니다. 그 외에는 단 한번도 내 자신이 잘 보이기 위해서 포즈를 취한 적은 없어요." 그렇게 생각하고 행동하는 이유는? "물론 없습니다. 저는 무슨 철학이나 삶의 원칙을 갖고 살아가지 않아요. 그저 그러고 싶을 뿐이고, 되는 대로 재미나게 사는 거죠."

하지만 그는 분명한 원칙이 있다. '작가주의'를 선언한 뒤 한차례도 상업 사진을 찍지 않았다. 남들은 원칙이라고 부를지 모르지만 그는 이렇게 표현했다. "원칙이니 철학은 아니고, 다만 선을 그을 때는 분명히 긋는 거죠. 이랬다 저랬다 해서는 곤란하잖아요." 기자는 다시 질문을 던졌다. "올봄 두바이에서 찍은 야경사진이 건설회사 광고에 쓰였고 광고대상까지 받았습니다. 작가 선언을 해놓고 상업 사진을 찍었으니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고 비난할 수도 있는데요?" 그는 질문을 기다렸다는 듯 답을 쏟아냈다. "제일기획에서 제안이 왔어요. 두바이에 한번 가보지 않겠느냐고. 좋잖아요? 여행가는 건데. 게다가 돌멩이 하나만 찍어와도 된다는 겁니다. 제안이 너무 마음에 들어서 수락했어요. 버즈 두바이(2005년 1월 착공한 세계 최고 높이(808m) 건물)를 찍는 줄도 몰랐어요. 밤에 너무 예뻐서 찍어왔는데 덜컥 대상을 받았습니다. 상업주의는 아니고 하다 보니 그렇게 된 겁니다. 예전에 상을 줬으면 더 좋았을텐데…. 하하하."

◆단 한명이라도 감동을 주는 작품을 찍겠다

그가 추구하는 작품은 어떤 것일까? 이런 질문을 해봤다. "100명의 관객이 있습니다. 한 작가의 사진을 보고 100명 모두 '훌륭하다'며 찬사를 보냅니다. 다른 작가의 사진을 보고 90명은 아무런 반응이 없는데 10명은 하염없이 눈물을 흘립니다. 어떤 작가가 되고 싶습니까?" 질문이 끝나기 무섭게 그는 "당연히 후자"라고 답했다. 부연 설명도 덧붙였다. "단지 찬사를 보내는 사람이 많다는 것은 이슈가 될 수 있고, 대중적인 작가가 될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작가는 단 한명이라도 자기 생각과 의도에 공감해 주는 관객을 원합니다. 정말 한명이라도 제 작품을 보고 깊은 감동을 받을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행복입니다. 앞으로 그런 사진을 찍을 겁니다."

슈퍼카 투어에 참여한 이유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이번 사진전을 보고 상업주의라고 볼지 모르겠습니다만, 재미있겠다 싶어서 도전한 겁니다. 개런티를 들으면 (너무 적어서) 깜짝 놀랄거예요." 행사장 전면에는 그가 찍은 '포르쉐 GT2' 대형 걸개사진이 붙어있다. 자동차 전면부를 약간 아래쪽 각도에서 찍은 작품. 포르쉐의 앞 램프가 마치 펼쳐진 날개처럼 위용을 드러내고 사진을 가로지르는 유려한 곡선은 잘 다듬어진 근육을 연상케 한다. 기자는 "이렇게 표현해도 좋을지 모르겠지만 '싫지않은 오만함'이 느껴진다. 그런 의도로 찍은 것인가?"라고 물었다. 그는 기자의 어깨를 툭 치며 이렇게 답했다. "하하하, 아무 생각없이 찍은거야. 멋있잖아."

김수용기자 ksy@msnet.co.kr 사진·이채근기자mincho@msnet.co.k

▨ 김중만은?

1954년 강원도 철원에서 태어나 만 17세이던 1971년 정부 파견의사인 아버지(김정·30여년간 의료봉사를 하다가 1999년 위암으로 아프리카에서 세상을 떴다)를 따라 서부 아프리카 부르키나파소로 갔다. 편의시설은 물론 전기도 없던 황무지에 대해 그는 이렇게 회고했다. "내가 꿈꾸었던 타잔의 땅이 아니었다." 그는 프랑스로 유학을 떠났고 힘겨운 생활 속에 사진을 발견했다. 원래 그는 프랑스 니스 국립응용미술대학에서 서양화를 전공했다. 사진이 인화되는 과정, 즉 창작물이 그토록 빨리 결실을 맺는 모습을 보고 사진의 매력이 빠져들었다. 필름값을 아끼기 위해 빈 카메라를 들고 사진을 배운 지 2년 만인 1977년 프랑스 ARLES 국제사진 페스티벌에서 젊은 작가상을 받았다. 같은 해 프랑스 '오늘의 사진'에 선정되었는데, 카메라 발명 이후 프랑스에서 선정된 80인의 사진가 중 최연소였다.

시련도 많았다. 비국적자가 개인전을 열었다는 이유로 국외 추방을 당했고, 마약 혐의로 정신병원에 보름가량 수감된 적도 있다. 하지만 그의 곁에는 카메라가 있었다. 이후 프랑스 패션잡지 '엘르' '보그' 등과 일했으며 1979년 귀국한 뒤 1988년 한국 국적을 회복했다. 패션 사진과 광고, 영화 포스터, 1천여명에 이르는 스타들의 사진을 찍기도 했고, 30년 만에 다시 찾은 아프리카를 배경으로 한 사진집 '동물왕국'도 출간했다. 그런 그가 2006년 11월 '작가주의'를 선언했다. 일년 전 찾아갔던 몽골 고비사막의 체험 때문. 너무나 볼품없고 찍을 게 없어 잠조차 오지 않던 그 때, 여행 중 만난 한 프랑스 부부가 이렇게 말했다. '당신이 잘못 보는 것 같다. 세상에 이런 곳은 여기 하나뿐이고 정말 아무 것도 없다. 그래서 아름다운 것 아니냐?" 이후 돌멩이 하나조차 미치도록 예뻐보였단다.

작가 선언 이후 일년가량 지난 작년 말 한 일간지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찍고 싶은 사진만 찍었다. 34년간 38만장을 찍었는데 올해만 2만장을 찍었다. 이것만으로도 만족이다." 그는 지난해 난꽃 사진 32점을 수록한 사진집 'THE ORCHID'(가로 35cm, 세로 43.7cm. 가격 37만원)를 발간했고, 현재 '스튜디오 벨벳언더그라운드'를 운영하고 있다.

김수용기자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