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相生의 땅 가야산](39)'귀거래사의 표상' 만귀정

한말 名 宰相 이원조 '晩歸亭'짓고 은둔

중국 동진(東晋)의 시인 도연명(陶淵明)이 쓴 '귀거래사(歸去來辭)'. 41세 때 팽택현의 지사(知事) 자리를 버리고 고향인 시골로 돌아가는 심경을 읊은 시로, 세속과의 결별을 고한 '선언문'으로 너무나 유명하다. "아, 인제 모든 것이 끝이로다/ 이 몸이 세상에 남아 있을 날이 그 얼마이리/ 어찌 마음을 대자연의 섭리에 맡기지 않으며/ 이제 새삼 초조하고 황망스런 마음으로 무엇을 욕심낼 것인가/ 돈도 지위도 바라지 않고/ 죽어 신선이 사는 나라에 태어날 것도 기대하지 않는다/ 좋은 때라 생각되면 혼자 거닐고/ 때로는 지팡이 세워 놓고 김을 매기도 한다/ 동쪽 언덕에 올라 조용히 읊조리고/ 맑은 시냇가에서 시를 짓는다/ 잠시 조화의 수레를 탔다가 이 생명 다하는 대로 돌아가니/ 주어진 천명을 즐길 뿐 무엇을 의심하고 망설이랴."

도연명 이후 수많은 이들이 '귀거래사'를 꿈꿨다. 하지만 그처럼 참다운 귀거래사를 실천한 이는 드물다. 세속의 끈을 떨쳐버리기 쉽지 않은 게 가장 큰 이유이리라. 얻을 수 없으면 더욱 간절해지는 법. 인류의 영원한 모태(母胎)인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은 지금껏 모든 이들의 염원으로 남아 있다.

이순(耳順)에 만귀정에 돌아오다!

성주군 가천면 면소재지에서 903번 도로를 따라 달리면 옥계가 나온다. 물이 흘러내리는 하얀 바위가 마치 흰 천을 펼쳐놓은 것 같다고 해서 포천(布川)계곡이라고도 불리는 아름다운 계곡이다. 옥계의 상류에 있는 신계리에서 금바위로 가는 길을 따라 5분여 정도를 더 가면 만귀정이 있다. 만귀정(晩歸亭)은 조선 후기에 공조판서 등을 지낸 응와(凝窩) 이원조(李源祚·1792~1871)가 만년(1851년)에 귀향해 독서와 자연을 벗 삼으며, 여생을 보낸 곳이다. 그래서 정자 이름에 늦은 나이에 돌아왔다는 뜻을 담았다.

만귀정은 옥계가 내려다보이는 경사지에 북동향해 자리잡았다. 정자 주변에는 아름드리 굵기의 전나무, 오래된 벚나무 등이 어우러져 숲을 이루고 있다. 만귀정은 돌로 약 1m 높이로 축대를 쌓아 그 위에 세웠는데 규모는 전면이 4칸이며, 측면 또한 칸살의 크기가 일정하지 않지만 4칸이다. 가운데 2칸은 마루로 앞뒤가 터져 있으며 양 옆으로 방이 있고 방 앞에는 툇마루가 1칸살 정도로 큰 마루와 연결돼 있다. 만귀정과 평삼문이 안마당을 사이에 두고 이자형(二字形)으로 놓여 있다. 평삼문 입구에는 응와의 학문 진흥에 대한 의지를 담은 철제로 된 흥학창선비(興學倡善碑)가 세워져 있다. 그리고 옥계 주변에는 만산일폭루(萬山一瀑樓)란 작은 정자도 있다. 가야산과 옥계의 빼어난 절경을 맘껏 감상하기에 안성맞춤인 곳이다.

경주부윤을 그만두고 고향인 성주로 돌아온 응와는 만귀정을 짓고 학계(學契)를 만들어 학문에 정진했다. 더불어 옥계의 아름다운 아홉곳을 중국 주자의 무이구곡에 견주어 포천구곡시를 남겼다. 그 중 9곡은 만귀정 주변 홍개동의 경관을 노래한 시다. "구곡이라 홍개동이 넓으니/ 백년이나 감추어 놓은 이 산천이라/ 새 정자 지어 몸을 편안히 하려 하니/ 아니 이것이 인간의 별천지인가."

"조물주는 나에게 성내지 말지어다."

성주군 월항면 대산리 한개마을에서 태어난 응와는 입재(立齋) 정종로(鄭宗魯)의 제자로, 18세에 증광문과에 급제했다. 입재는 퇴계 학맥을 이은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의 문인이면서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의 6대손이다. 이황-류성룡-정경세로 이어지는 가학과 이황-김성일-이현일-이재-이상정으로 이어지는 학맥의 두 학통을 연결시키는 인물이었다. 입재를 거친 퇴계 성리학은 응와를 거쳐 그 조카인 한주(寒洲) 이진상(李震相)에게로 이어졌다.

응와가 출사한 시기엔 당쟁이 심하고, 응와 스스로도 불의와 타협하지 않은 올곧은 성품이어서 벼슬길이 순탄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목민관으로 있던 고을에서는 선정에 대한 주민들의 칭송이 쏟아졌다. 대사간과 공조판서, 판의금부사 등의 요직도 두루 거쳤다. 응와가 세도정치기에 영남 남인 출신으로 예외적으로 고위 관직에 진출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 그가 뛰어난 학문적 실력을 소유한 당시 영남 남인학파의 대표적 관료라는 점 때문이었다. 여기에다 철종대 이후 영남 사족 포용정책 실시, 대원군의 개혁정치 실시 등이 더불어 작용한 것으로 풀이된다.

응와는 튼튼한 학문적 축적을 바탕으로 관계(官界)에 나아가 흥학(興學)과 세교(世敎)를 일생의 임무로 삼았다. 그러면서도 정치 경제 등 현실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도 탁월해 성리학에만 매몰된 학자들과는 달랐다. 40여년 동안 관리로 일하면서도 '응화문집' 등 13종의 다방면에 걸친 저서도 남겼다.

그는 스스로 "성품이 산수를 좋아한다"고 했다. 또 매양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을 갈망했다. 벼슬살이를 위해 세상으로 나아간 시기에도 자연으로 되돌아와서 한가롭게 자연을 완상하며 지내리란 결심을 한시도 잊은 적이 없었다. 그 계획은 벼슬에서 물러나 가야산 아래 옥계의 만귀정으로 돌아옴으로써 실현됐다. 자연에 대한 생각과 자연으로 돌아가서 그 자연을 즐기고자 하는 그의 의지를 '만귀정'이란 시에서 엿볼 수 있다. "돌아옴이 늦은 것을 한탄하지 아니하니/ 올해가 비로소 육순이 되는 해이네/ 참으로 세상의 생각을 잊음이 아니요/ 애오라지 한가한 몸을 기를 수 있네/ 벽지에 처하니 심신이 안온하고/ 황무지를 개척하니 안목이 새롭네/ 산림에 사는 것 이것이 내 본분이니/ 조물주는 나에게 성내지 말지어다."

글·이대현기자 sky@msnet.co.kr

박용우기자 ywpark@msnet.co.kr

사진·박노익기자 noik@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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