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시론] 참을 수 없는 정치의 가벼움

1801년 다산 정약용은 간신히 목숨만 부지한 채 전라도 강진의 유배지에 도착했다. 신유박해의 결말이었다. 1800년 정조가 갑자기 숨을 거두자, 노론은 정조 연간에 큰 논란을 야기한 천주학 문제를 다시 정치 쟁점화했다. 당시 천주학의 핵심인사들은 주로 남인들이었다. 천주학은 남인을 제거할 절호의 대의명분이었던 것이다. 정약용의 막내 형 정약종은 모진 고문 끝에 처형당했다. 둘째 형 정약전도 흑산도에 유배되었다. 이로써 탕평의 시대는 막을 내렸다.

다산은 살아남았지만, 가문은 결국 폐족이 되었다. 정약종의 죄목이 대역부도죄였던 결과 그 일족은 과거시험자격이 박탈되었기 때문이다. 가문은 존폐의 기로에 섰다. 다산은 유배지에서 두 아들에게 편지를 썼다. "어째서 스스로 포기하려 하느냐. 영원히 폐족으로 지낼 것이냐? 너희 처지가 비록 벼슬길은 막혔다 해도 성인(聖人)이 되는 일이야 꺼릴 것이 없지 않으냐?" 다산은 폐족의 시련을 영원한 진리를 갈구하는 수행으로 승화시키고자 했던 것이다.

다산은 훈계만이 아니라 스스로도 그렇게 살았다. 그런데 우리를 숙연케 하는 것은 일신과 일문의 불행을 이겨내려는 다산의 용기만이 아니다. 그가 이 가혹한 시절에도 백성을 잊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사람이란 자신의 손톱에 가시만 박혀도 남의 형편 따위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 법이다. 그러나 다산은 오히려 "가난하고 곤궁하여 고생하다 보면, 그 마음을 단련하고 지혜와 생각을 넓히게 되어, 인정(人情)이나 사물의 진위를 옳게 알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자신이 아파 보니, 남 아픈 것도 절실히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유배지 강진에서 그는 백성의 삶을 직접 보면서 자주 눈물을 흘렸다. '목민심서' 서문에서 다산은 "내 처지가 비천하므로 들은 것이 매우 상세하였다"고 말하고 있다. '목민심서'는 붓이 아니라 눈물로 쓴 책이다.

오늘 다시 다산을 생각하는 것은 우리 시대의 정치적, 도덕적 열정이 많이 고갈되었다는 소회 때문이다. 80년대의 대학에는 정치적 열정이 펄펄 끓었다. 젊은이들은 소금 안주로 소주잔을 비우며, 토론으로 밤을 지새웠다. 비록 거칠고 미숙했지만, 그때 젊은이들의 가슴에는 이상에 대한 갈구가 가득했다. 물론 그 시절로 다시 돌아가고 싶지는 않다. 너무 어둡고 불행했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대학은 밝고 자유롭다. 그리고 정치와 도덕에 대한 열정이 사라진 곳에 재테크, 스포츠, 게임 그리고 취업 경쟁이 자리 잡고 있다.

금번 총선에서 대학의 부재자 투표가 매우 저조하다고 한다. 또한 지난달 말 중앙선관위의 조사에 따르면 유권자의 52%만이 투표에 참여하겠다고 했다고 한다. 사실 우리 학생들은 취업의 두려움 때문에, 그리고 서민들은 생활고 때문에 정치에 관심을 가질 여가가 없다.

바야흐로 탈정치의 시대이다. 우리만 그런 것은 아니다. 이웃 나라 일본도 무당파층이 50%가 넘는다. 서구국가들의 정치는 이미 70년대에 '이념'에서 '생활'로 바뀌었다. 혁신정당들은 혁명을 포기했다. 변신하지 못한 일본 사회당은 역사 속으로 아주 사라져 버렸다. 이명박 정부의 '실용'이나, 진보의 방황도 그런 세계사적 맥락에 서 있다. 한국 정치는 오랜 이념의 터널을 막 빠져나오고 있는 중이다.

그런데 정치란 빙하 같은 것이다. 없는 듯하지만 숨어 있을 뿐이다. 한때 유태인들은 정치 없이도 살 수 있다고 생각했다. 국가 없는 민족으로 생존하기 위해 돈에 몰두했다. 정치 외에 세속에서 가장 강한 것은 돈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공동체와 무관한 유태인의 거대한 부는 사회의 증오를 불러 일으켰다. 그것이 뒷날 큰 비극의 씨앗이 되었다. 돈이 커지면 정치가 된다는 사실을 망각했던 것이다. 이처럼 정치란 없다고 생각하는 순간, 숨겨진 빙하처럼 타이타닉호도 침몰시킨다.

다산은 "마음에 항상 만백성에게 혜택을 주어야겠다는 생각과 만물을 살려야겠다는 뜻을 가진 뒤라야 비로소 참답게 공부한 군자라 할 수 있다"고 말했다. 군자의 학문은 이미 낡았다. 그러나 나는 이런 정치적 포부를 지닌 사람, 그런 도덕적 꿈을 가진 사회가 그립다.

김영수(영남대 정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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