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샨보이/아사다 지로 지음/오근영 옮김/대교베텔스만 펴냄
브라질 할아버지의 술/메도루마 순 지음/유은경 옮김/도서출판 아시아 펴냄
동시대 두 일본 작가의 소설 2권이 비슷한 시기에 출간됐다. 아사다 지로의 소설집 '슈샨보이'와 메도루마 순의 소설집 '브라질 할아버지의 술'이다. 아사다 지로는 1951년 도쿄 출생이고 메도루마 순은 1960년 오키나와 나고 시 인근에서 태어났다.
아사다 지로는 아홉살 때 집안이 몰락하는 바람에 가족이 흩어졌고 야쿠자 똘마니 생활을 하면서 사춘기를 보냈다. 도쿄의 화려한 네온사인 아래 구정물 흐르는 뒷골목을 걸어다닌 것이다.
메도루마 순은 오키나와 출신이다. 이곳은 원래 류큐 왕국이었다. 1590년 도요토미 히데요시 정권의 공물요구를 받았고, 1609년 일본 동남부에 위치한 사쓰마 번의 침공을 받았다. 1879년 오키나와 현으로 일본에 복속됐다.
제2차 세계대전 중 오키나와 전투(1941)는 오키나와 인들의 정체성에 혼란을 더했다. 적군인 미군은 연안에 함대를 정박하고 연일 포를 쏘아댔고, 전황이 나빠지자 아군인 일본군은 오키나와 인들에게 자살을 강요했다. 살아남은 자들은 동굴 속에 숨어 지내다가 미군 토벌대의 화염방사기 세례를 받았다. 전쟁이 끝난 후 미국의 통치를 받던 오키나와는 1972년 일본에 반환됐다. 우리나라 프로야구 구단의 겨울 전지훈련장으로 이름난 곳이기도 하다.
아사다 지로의 '슈산보이' 와 메도루마 순의 '브라질 할아버지의 술'은 두 작가의 출생과 유년시절 환경을 집요하게 반영하고 있다. 공교롭게도 이번 두 소설집에는 2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하는 회고 형식의 소설이 실려 있다.
슈산보이(구두닦이) 기쿠지는 2차 세계 대전 당시 남방 전투에서 살아남은 사람이다. 철수 중 수송선이 침몰했고 바다 위를 떠도는 동안 물에 떠다니는 기름 때문에 눈과 목을 다쳤다. 그래서 그는 남의 구두에 눈을 바싹 갖다대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다. 목소리가 컬컬한 것도 기름 때문이다. 오늘 날 일본의 화려한 성공 이면에 존재하는 슬픈 과거인 셈이다.
패한 전쟁의 참전병인 그는 구두를 닦고 성공한 일본 신세대는 구두닦이의 과거에 관심을 갖지 않는다. 슈산보이는 전쟁 고아인 '보스'를 자식처럼 키우고 공부시켜 중소기업의 사장으로 성장하는 것을 지켜보며 죽어간다. 누구도 관심을 갖지 않았지만 '누가 뭐라 해도 남루한 과거는 화려한 현대의 밑거름'이라는 말처럼 들린다.
소설집에 포함된 또 다른 소설 '눈보라 속 장어구이'는 더 이상 장어를 먹지 못하게 된 미타무라 육군대장이 눈 내리는 겨울밤 장어구이를 사서 부대로 돌아와 당직병에게 먹으라고 건네면서 시작한다.
당직병인 나는 감히 장어를 먹을 수 없다. 그래서 '각하께서 드시라' 했지만 사단장은 거절한다.
"사단장님은 장어를 싫어하십니까?"
"아니, 아주 좋아한다."
"그럼 사단장님이 드십시오."
사단장은 자신이 장어를 먹지 못하는 이유를 설명한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최전방 솔로몬제도에서 작전을 펼치던 미타무라 소좌는 후방의 회의에 참가하게 됐다. 황궁에서 전황을 파악하기 위해 전직 참모총장이자 황족이 각 지역의 지휘관을 후방의 산 미게르 섬으로 불러모았던 것이다.
회의에 참가한 미타무라는 참가자들의 냉대를 받았다. 그는 최전방 솔로몬제도에서 온 사람이었다. 군복은 지저분했고, 총은 화약냄새가 진동했으며, 군도는 여러 사람의 피를 머금고 있었다. 그는 상처에서 비집고 나온 구더기를 아무렇지 않게 씹어먹었다. 전선에서 구더기는 훌륭한 단백질 공급원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깔끔한 옷차림에 값비싼 단추와 각진 모자를 쓴 다른 부대 지휘관들은 그를 경멸했다.
'저렇게 꾀죄죄한 소좌 따위가 이런 회의에 참가하다니….'
미타무라가 속한 최전방 군대는 굶주림과 말라리아에 쓰러지고 있었다. 그러나 회의에 참가한 지휘관들은 하나마나한 전황보고를 지껄이고 있었다. 미타무라는 이야기를 집어치우고 황궁에서 제공한 장어구이를 먹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그가 전황을 보고해야 할 차례가 왔다. 미타무라는 "잘 먹겠습니다!" 하고 사관생도처럼 큰소리로 말하고 꾸역꾸역 장어를 씹어먹었다. 군 참모장이 테이블을 두드리며 말했다.
"무례한 행동에도 정도가 있다. 전하께 사죄하라."
진짜 전쟁을 모르는 사람들이었다. 전쟁을 모르는 사람들이 전쟁터에서 돌아온 사람을 호통치는 형국이었다. 진짜 전쟁을 모르는 혹은 진짜 전쟁을 숨기고 싶은 본토 사령부는 '보고할 말과 보고하지 말아야 할 말을 구분하라'고 압력을 넣었다.
당시 일본 군대는 패한 군대를 살려두지 않았다.
'전쟁에서 패한 군인은 어떻게 해서든 죽어줘야 했다. 징벌이 아니었다. 연전연승의 대본영 발표를 거짓으로 만들지 않기 위해 패한 자는 죽어줘야 했다.' 패한 군대는 다른 전투에 거듭 투입되면서 죽어갔다.
작가 아사다 지로는 그 와중에도 살아남은 미타무라와 슈산보이 기쿠지를 통해 '보여지는 일본' 아래 '숨겨진 일본'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고발문학은 아니다. 아사다 지로는 '슬픈 사연이 있다'고 말할 뿐이다.
메도루마 순의 '브라질 할아버지의 술'은 일본의 주변부에서 살아온 사람, 본토의 아픔보다 더 많은 아픔을 겪었지만, 본토인과 역사를 공감할 수 없는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오키나와 출신작가 메도루마 순은 주류에서 벗어나 있다는 점에서 도쿄의 구정물 흐르는 골목길을 걸었던 아사다 지로와 비슷한 경험을 공유한다. 오키나와 출신의 브라질 할아버지는 일본인이지만 일본의 잘난 역사에 참가하지 못했다. '잘난 일본'이 제국주의로 팽창하던 시절 그는 먹고살기 위해 브라질에 가야 했고, 브라질에 가 있는 동안 오키나와에 남은 그의 가족들은 미군과 일본군에게 학살됐다. 고향으로 돌아온 그에게 남은 것은 고독과 환경오염뿐이었다. 본토의 개발바람은 오키나와에도 불어닥쳤고 제당공장의 폐수와 양돈장의 배설물은 강을 오염시켰다. 강에는 먹을 수 없는 기형물고기뿐이었다.
'절대로 먹을 수 없는 물고기' 틸라피아와 화려한 일본의 부활은 묘한 대조를 이룬다. 일본은 화려하게 부활했지만 고통의 정점에 존재했던 오키나와에 남은 것은 '절대로 먹을 수 없는 물고기' 틸라피아였다.
소설집 '브라질 할아버지의 술' 속에 포함된 또 다른 소설 '투계'는 오키나와 반환으로 현지 조직폭력배들이 본토 조직폭력배의 침범에 대비해 뭉치고 더욱 악한이 돼 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현지 폭력배는 본토 폭력배의 침입이 두려워 현지 지배를 더욱 공고히 하고, 그 과정에서 현지인을 더욱 핍박한다. 본토와 같은 성공 따위는 누려본 일이 없지만 폐해는 더욱 심각한 것이다.
이 작품 역시 고발문학은 아니다. 아사다 지로와 마찬가지로 메도루마 순은 인간의 삶을 이야기할 뿐이다. 메도루마 순의 소설은 이에 더해 오키나와 특유의 자연과 영혼의식, 토속성을 진하게 품고 있다. 일본 본토의 현대 소설과 느낌이 많이 다르다. 옮긴 이 유은경 교수는 번역작업 전 오키나와를 여행하면서 '낯선 일본'을 절감했다고 밝히고 있다. (슈산보이, 311쪽, 9천500원)(브라질 할아버지의 술, 253쪽, 1만원)
조두진기자 earful@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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