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박기섭의 목요 시조산책] 늦은 깨달음/정표년

늦은 깨달음

정표년

여벌로 마련해 둔 목숨이 있다 하면

내 자리 비워야 할 때 돌려쓸 수 있을 텐데

손 놓고 누워버리니 차마 적막이더군

사는 게 정신 없어 아플 새도 없었는데

어느 날 대책 없이 자리에 눕고 보니

그제야 알겠더라고 돌아가는 이치를

한 사람 없더라도 세상은 돌아가고

남아있는 사람들은 제 할일 다 잘하고

없는 자 빈자리에는 뭔가로든 찬다는 걸

그렇습니다. 세상에 한 벌뿐인 목숨이기에 우리는 그 목숨을 버리지 못합니다. 비록 남루일망정 찢어지면 깁고 터지면 얽어서라도 이승의 눈비를 건너야지요. 낭패라면 여벌이 없어 막상 자리를 비워야 할 때 돌려쓰지 못한다는 사실.

누구나 대책 없이 자리에 눕고 보면 삶은 차라리 적막입니다. 한 사람 없더라도 세상은 돌아가고, 그 빈자리는 뭔가로든 차기 마련. 좀 섭섭하긴 해도 그게 우리네 삶의 속내인 걸 어쩝니까. 어기차게 부대낄 적엔 몰랐다가 정작 병석에 들어서야 알아차리는 이치라니. 낭패라면 그런 깨달음이 늘 몸이 기울 만큼은 기운 뒤에야 온다는 사실.

달성 하빈의 봉촌리. 그곳에 耳順(이순)의 시인이 삽니다. 언제 찾든 나직한 흙담 너머로 물 한 사발 건넬 것 같은, 고향 마을 먼 뉘 같은 시인. 거처가 곧 적소일지도 모를 그곳에도 복사꽃 참꽃 겨운 봄이겠지요.

박기섭 시조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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