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달 전 딸을 낳은 조모(33·여)씨는 출산 당일에야 성별을 알았다. 임신 5개월쯤 출산 준비물을 마련하기 위해 의사에게 태아 성별을 물어봤지만 의사는 정색을 하며 '위법'이라고 거듭 주의를 줬다. 성별 고지를 하면 의료법 위반에 해당돼 의사 면허가 정지될 수 있다는 말까지 덧붙였다. 조씨는 "내 뱃속 아이가 아들인지 딸인지조차 알 수 없다는 건 너무하지 않느냐"며 "왜 위법인지 모르겠다"고 불평을 터뜨렸다.
◆모두가 아는 '비밀'
10일 한 변호사 부부가 임신 9개월 된 태아의 성별을 의사에게 알려달라고 했다가 거절당하자 제기한 위헌재판의 공개변론을 계기로 태아 성감별 금지법의 위헌 여부를 둘러싼 해묵은 논쟁이 재연되고 있다.
위헌을 주장하는 변호인 측이 "태아 가족의 기본권을 침해한 것"이라고 주장하자, 합헌 입장인 보건복지가족부 법정대리인은 "성감별 허용은 딸의 낙태로 이어져 생명경시 풍조를 야기한다"고 맞섰다.
최종 선고를 앞둔 이번 재판을 둘러싸고 시민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팽팽하게 맞서고 있다. 무용론은 이 규정이 시대착오적이고 사문화됐다고 주장한다. 셋째 딸을 출산할 예정인 최모(34·여)씨는 "딸이 더 대우받는 요즘 세상에 딸이라고 낙태를 한다는 건 상상하기 힘들다"며 "아이 성별을 알면 태교나 출산물 준비에 큰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산부인과 병원에서 출산 전 성별 정보가 알려지는 것은 공공연한 사실이다. 올 초 아들을 출산한 박모(33)씨는 "의사가 아내에게 '(튀어나온 게) 보이죠?'라며 묻는 것을 듣고 아들인 줄 알았고, 직장 동료는 '옷 예쁘게 입히세요'라는 의사 말에 딸인줄 알았다고 한다. 이게 무슨 비밀이냐"고 했다.
태아 성감별 금지 위반으로 처벌된 사례는 2005년 단 1건 있었다. 당시 태아 성별을 알려준 혐의로 기소돼 대법원에서 벌금형을 받고 6개월 의사면허 자격 정지를 당했던 의사는 이날 변호사 부부와 함께 법정에 섰다. 이 의사는 "다른 병원에서 다 알려주는데 왜 여기만 안 되느냐고 항변하면 할 말이 없다. 의사를 전과자로 만들기 위한 조항 아니냐"고 성토했다.
의료법 제20조는 의료인이 태아의 성별을 임부와 가족 등에게 알려주는 것을 금지하고 있으며, 위반시 의사 면허정지 처분을 규정하고 있다. 형법도 3년 이하 징역 또는 1천만원 이하의 벌금을 규정하고 있다.
◆여전히 '뜨거운 감자'
의사협회를 비롯한 대다수 산부인과 의사들은 태아 성감별 금지 조항에 대해 현실성이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미래여성병원 김경열 원장은 "남아 선호 경향 때문에 성감별 금지 조항이 만들어졌지만 요즘은 성별에 따라 골라 낳는 경우가 거의 없다"며 "정부가 우려하는 불법 낙태를 막기 위해 낙태가 힘든 임신 28주 이후에 성별을 알려주는 방안을 검토해야 한다"고 말했다. 클레오여성의원 김중기 원장도 "법으로 아무리 금지해도 아는 의사 등에게 알아가는 경우가 많아 의미가 퇴색됐다"고 했다.
임규옥 의료전문 변호사는 "어차피 태아의 성이 궁금한 부모와 이를 알려준 의사들의 이해가 타협했기 때문에 성별 금지 위반으로 고발되는 사례가 전무하다"며 "부모의 '행복추구권'을 보장한다는 측면에서 부모이기 때문에 당연히 태아의 성별을 알 권리가 있으며 그에 따른 기쁨을 누릴 권리가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정부와 여성계에서는 성별 고지 금지 조항의 존치론을 펴고 있다. 대구의 한 여성단체는 "남아선호사상이 여전히 만연해 있기 때문에 마땅히 필요한 규정"이라며 "이 조항이 없어지면 대를 잇는다는 명목으로 몰래 딸을 낙태하는 행위가 공공연하게 이뤄질 것"이라고 우려했다. 산부 가족의 알 권리가 태아의 생명권을 넘어설 수 없다는 논리다. 보건복지부 관계자도 "남아선호사상이나 남녀 성비의 심각한 불균형과 같은 국가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꼭 필요한 규정"이라고 폐지반대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대구의 남녀 신생아 성비는 2000년 88.2%(남아 대비 여아의 비율)에서 2006년 91.5%로 해마다 딸 출산율이 높아지고 있다.
이호준기자 hoper@msnet.co.kr 한윤조기자 cgdream@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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