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남자가 있다. 한남자는 자유진영으로 망명했다 비행기 불시착으로 다시 소련에 억류됐다. 다른 남자는 평등을 찾아 소련으로 망명했다. 한 남자는 발레를 하는 백인, 다른 남자는 탭댄스를 추는 흑인. 추는 춤과 피부 색깔이 다른 이들은 상대방의 춤을 배우며 소통하고 교화된다. 이들의 춤은 바로 '자유'를 향한 갈망이다.(영화 '백야')
영화 속에서 춤은 자유 혹은 젊음의 상징으로 은유된다. 춤은 주인공을 옥죄거나 억누르는 숨가쁜 현실의 탈출구다. 그러나 현실은 전혀 다른 세계이다. 그 중에서도 남자 무용수의 길은 험난하다. 주위의 오해와 편견, 현실의 제약과 싸워야 한다. 남자 무용수라고 하면 무슨 동성애자 보듯 하던 세간의 시선이야 많이 달라졌다지만 이들의 삶은 여전히 고달프다. 대구시립무용단 남자 무용수 13명으로부터 그들의 세계에 대해 들어봤다.
◆편견 때문에 고달프다
남자 무용수들의 고달픔은 '남자가 무슨 무용을 하냐'는 세간의 시선 때문에 시작한다. 그 이면에는 또 '춤은 여성스러운 것'이라는 편견이 자리 잡고 있다. 대구시립무용단원 이승대(35)씨는 "1980년대 말이나 1990년대 초까지도 남들에게 '무용한다'는 말을 꺼내지 못했다"고 기억했다.
그래도 예전에 비하면 인식이 많아 좋아졌다. 이씨는 "요즘 또래들 사이에서는 생각이 많이 달라진 것 같다. 오히려 일반인들이 하지 못하는 것을 하고 산다며 부러움의 대상이 된 것 같다"고 했다.
그래도 사람들의 선입관은 쉽게 고쳐지지 않는다. 일반인들이 무용수와 관련해 가장 궁금해 하는 대목은 아무래도 신체 접촉에 관한 것이다. 남녀가 한데 뒤엉켜 공연을 하다 보면 성적으로 자극을 받지 않느냐는 추측이다. 이에 대해 무용수들은 "전혀 그렇지 않다"고 손사래를 쳤다. 윤진혁(40)씨는 "공연 중에는 '힘들어 죽겠다'는 생각뿐이다. 전혀 그런 생각이 안 든다"고 잘라 말했다.
공연 중 노출 장면에 대한 논란에도 할 말이 많았다. 노진환(36) 트레이너는 "사람들 중에는 '왜, 꼭 벗어야만 하나'라고 하는 사람이 있는데, 옷을 벗는 것도 표현 방법의 하나일 뿐, 절대 성적인 의도로 하는 것이 아니다"고 역설했다.
특정 부위에 대한 관객들의 시선에 대해 무용수들은 부담을 느낄까. 대구시립무용단원들은 "처음에는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자꾸 하다 보니 무심해졌다"고 했다. 물론 발레리노(발레를 하는 남자 무용수)가 입는 타이츠 때문에 일부러 발레를 피했다는 단원도 있다고 한다.
◆그건 오해예요, 오해!
발레리노를 볼 때 일반인들의 시선이 유난히 가는 신체 부위가 있다. 다름 아닌 가랑이 사이. 몸에 꽉 붙는 의상을 입기에 몸의 굴곡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특정 부위를 두드러져 보이려고 일부러 무언가를 넣는 것은 아닐까. 이 질문에 단원들은 "그렇지 않다"고 답했다. 그건 무용수들이 속에 받쳐 입는 '지지용 내의(Support underwear)'라고 했다. 쉽게 말해 '남자용 코르셋'. 윤진혁씨는 "하루 종일 무용 연습을 하다 보면 남자들은 불편하게 돼 있다. 그래서 몸을 움직이는 데 방해받지 않기 위해서 지지용 내의를 입는데 그것이 특정 부위를 볼록하게 보이는 것"이라고 귀띔했다.
"연습을 오래 하다 보면 엉덩이가 아프다. 그래서 끈을 한쪽으로 흘려서 연습을 하기도 한다"는 설명도 이어졌다. 치질로 고생하는 단원들도 있다고 한다. 이승대씨는 "지지용 내의가 불편해서 휴지를 넣기도 한다더라. 성적 매력을 강조하기 위해서 그러는 건 아니다"고 덧붙였다.
'남자 무용수 중에는 동성애자가 많다'는 항간의 억측에 단원들은 고개를 저었다. 일반인 중에도 동양보다 서양에 동성애자가 많은 것과 같은 원리라고 했다. 국내에도 "동성애자가 있을 수도 있다"고만 했다. 이씨는 "외국에선 몸을 탐구하는 과정에서 신체 접촉을 많이 하다가 자신의 성 정체성을 찾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한국에선 '남성성'을 강조하다 보니 그런 사례가 없다"고 분석했다. 최두혁(43) 대구시립무용단 예술감독은 "예술적 기질이란 특성상 다른 분야에 비해 많을 수는 있다. 예전에 같이 공연한 독일 무용수가 게이였는데 일상생활에선 그저 동료일 뿐"이라고 했다.
◆현실 앞에서 작아지는 '남자' 딱지
'남자=가장' 공식은 이들에겐 벗어날 수 없는 장벽이다. 대구시립무용단 같은 관립 무용단 소속이면 무용수들 사이에 '귀족'으로 통하지만 결혼은 엄두도 못 낸다고 했다. 생계수단이 마땅치 않기 때문이다. 단원들 중에도 기혼자는 겨우 3명(최 감독도 기혼이다)에 불과하다. 단원들은 그 중 "두사람은 집안이 잘 살아서 결혼을 할 수 있었다"고 일러주었다.
무용단에서 받는 기본 수입은 생계비 정도라고만 했다. 나머지는 부업으로 해결해야만 한다. 학원 레슨이나 공연 개런티는 그나마 전공을 살리는 것이라 괜찮은 편이다. 주유 보조, 신문배달, 대리운전 등 가릴 것 없이 해야 한다. 단원들은 이에 대해 '악착같이 살아야 한다'고 표현했다. 최 감독은 "프로 단체가 아니라면 세계 어딜 가나 상황은 마찬가지"라고 설명했다.
군 문제는 남자로서의 운명이다. 그나마 국내 콩쿠르에서 수상하면 군 면제의 길이 있었는데 이젠 이마저도 힘들게 됐다. 기준이 엄격해졌기 때문이다. 병역 특례 방침이 바뀌면서 일정한 규모의 파리국제콩쿠르나 미국의 잭슨콩쿠르 등 공인된 국제대회에서 입상하지 않는 이상 무조건 군에 가야 한다. 젊은 한국 무용수가 이런 대회에서 입상한다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남자 무용수의 전성기를 35세 전후로 볼 때 군생활 2년은 엄청난 손실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단원들은 "일반인들은 무용하는 남자에 대한 환상을 갖는 것 같다"고 입을 모았다. '뭔가 특별한 것이 있을 것'이라는 건데 사실은 다른 사람들과 똑같단다. 이승대씨는 이렇게 말했다. "남자 무용수도 배 고프면 밥 먹고, 술도 마시는 사람이다."
조문호기자 news119@msnet.co.kr
■대구시립무용단원들의 말말말
윤진혁:대학생 때 다른 대학교 여학생과 미팅을 했다. 무용학과에 다닌다고 소개했더니 무역학과로 알아듣더라. 부모님께 등록금 고지서를 드렸는데 말씀도 않고 등록도 안 해서 제적이 된 적도 있다.
노진환(트레이너):여자들도 처음에는 무용수라고 하면 '멋있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들의 상황을 알고 나면 더 이상 가까이 안 하려 한다. 사귀더라도 연애 땐 비밀로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여전히 부모들은 '딴따라' '쌈마이' 정도로 보는 것 같다.
박종수: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무용을 시작했지만 친구들에게 말을 꺼내지 못했다. 부끄럽고 ×팔리기도 해서 태권도 학원에 다닌다고 거짓말했다. 친구들한테 들켜서 욕 꽤 먹었다.
이승대:춤을 사실적으로 표현하다 보면 스킨십이 잦아진다. 이런 걸 두고 '둘이 사귀는 거 아니냐'는 둥 '사생활이 난잡할 것'이라는 둥 말을 많이 한다. 작품의 일부일 뿐이고 공연은 무대에서 끝이 날 뿐 실제 삶이 아닌 것을 알아줬으면 좋겠다.
송경찬:대학 무용과 오디션 때 황당한 경험을 했다. 원래 남자 무용수는 여자와 달리 타이츠를 먼저 입고 바지를 입어야 한다. 그런데 그걸 가르쳐 주는 사람이 없어서 여자들처럼 바지 위에 타이츠를 입고 갔다. 사람들이 이상하게 쳐다보더라. 그날 이후로 나는 '슈퍼맨'이라고 불렸다.
이승대:대구시립무용단은 국내 관립무용단으로서는 유일하게 현대무용단인데 여기에도 편견이 있는 것 같다. 현대무용 하면 사람들이 가수들 백댄서로 생각한다. 요즘 현대무용 얼마나 재미있는데…. 감동·이야기 있을 건 다 있다. 부담없이 보고 즐기면 된다. 관객들이 지속적인 관심을 보여줬으면 좋겠다.
윤경호:무용수로 사는 것이 반드시 가난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경제적으로 힘든 것이 사실이다. 새벽부터 동료 아버지 농장에서 일을 한 적도 있다. 막노동을 하기도 했다.
박홍기:잔 부상이 많음에도 체계적인 관리가 안 되는 것도 문제점이다. 일반인들은 걷기도 힘들 정도이지만 주사를 맞아 가면서까지 공연을 뛰어야 하는 것이 무용수들의 숙명이다. 최근 들어 병역 특례 기준이 엄격해진 것도 고민이다. 몸을 매일 써야 하는 무용의 특성상 제대 후 회복기까지 고려하면 3년 이상 걸린다. 병역 면제 기준을 강화한 것은 남자 무용수의 싹 자체를 잘라버리는 것이다.
조문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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