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로움은 재즈의 생명이다. 오선지 위의 각종 표기에 짓눌려 판에 박힌 듯한 음악을 쏟아내는 것이 아니다. 연주자가 누구냐에 따라, 관객의 반응에 따라 그 호흡은 달라진다. 음악이 있으면 춤이 있는 법이다. 1920~30년대 미국 뉴욕 할렘가에 위치한 사보이(Savoy) 클럽의 흑인들은 스윙재즈를 자신만의 춤으로 만들었다. 바로 스윙댄스(Swing dance)의 시작이었다.
스윙댄스의 '고수'들이 한국을 찾았다. 지난 4~6일 서울에서 열린 '2008 코리아 린디홉 레볼루션(Korea Lindyhop Revolution·KLR)'에 스윙댄스계의 올스타로 구성된 8인조 '실버 섀도우스(the Silver Shadows)'가 참여한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국내는 물론 아시아 각국의 남녀 춤꾼 100여쌍이 몰려들었다. 그 축제의 현장을 찾아가봤다.
◆스윙댄스 무아지경
실버 섀도우스는 이번 행사에서도 3회의 공연을 통해 그들의 역량을 아낌없이 보여 주었다. 한국 스윙댄서들은 그들의 표정 하나, 숨소리 하나라도 놓칠세라 주의를 기울였다. 그들의 안무는 힘차면서도 다양했다. 그리고 재미도 있었다. 공연 내내 박수 소리가 끊이지 않았고 사람들은 멋진 동작에 탄성을 질렀다. 국적도 인종도 다른 사람들이 스윙 댄스를 통해 일체가 돼 움직인 순간이었다.
허모(24·여·제주 '스윙아일랜드' 회원)씨는 "대학원 조교인데 평소보다 일을 일찍 마치고 왔다"고 말했다. 영어 강사 벤 레프(28·대구 '스윙과 사람' 회장)씨는 "행사 소식을 듣고 미국 휴가 뒤 귀국 일정을 앞당겼다"고까지 했다. 4일 오후 7시 시작된 미니 워크숍부터 7일 자정 무렵 사인회까지 이들의 일거수일투족에 한국 스윙댄서들은 흥분하고 감격했다.
스윙댄서들은 자신을 '스윙 키즈'(Swing Kids: 1993년작 영화 제목이기도 함)라고 부른다. 이들은 스윙화를 신고 말쑥히 옷을 차려입는다. 그리고 누구나 무대 위의 주인공이 된다. 선수가 아니어도 좋다. 그저 음악에 귀를 기울이고 자신의 파트너에 시선을 집중할 뿐이다. 굳이 배운 것을 그대로 따라할 필요는 없다. 스윙재즈 선율에 따라 자신이 느끼는 대로 자신의 몸으로 '표현'하면 그만이다.
그동안 세상의 모든 근심 걱정은 사라진다. 이쯤 되면 무아지경이다. 힘든 하루를 보낸 직장인도, 취직 걱정을 해야 하는 대학생도 마룻바닥 위를 헤집고 다니다 보면 어느덧 스트레스가 말끔히 사라진다. 그래서 이들에게 스윙댄스는 끊으려야 끊을 수 없는 '마약'과도 같다. "스윙감이 없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바로 이들의 모토다.
◆스윙댄서의 우상 실버 섀도우스
실버 섀도우스는 지난 2004년 앤디 레이드(Andy Reid·31)와 니나 길켄슨(Nina Gilkenson·23), 스카이 험프리스(Skye Humphries·24)와 나오미 우야마(Naomi Uyama·26) 4인조로 시작했다. 현재는 2006년 충원된 토드 야나코네(Todd Yannacone·22)와 프리다 세게르달(Frida Segerdahl·26), 피터 스트롬(Peter Strom·30)과 라모나 스태펠드(Ramona Staffeld·24) 등 8인조로 활약하고 있다. 개인 수상 경력만 합쳐도 수십회에 달하는 '올스타 스윙댄서'로 구성된 실버 섀도우스는 데뷔 이후 순식간에 각종 스윙댄스 대회 단체 부문에서 단연코 돋보이는 팀으로 성장했다.
이들은 스윙댄스가 유행했던 1920, 30년대 분위기를 가장 충실하게 재현하면서 창조적인 공연으로 정평이 나 있다. 스윙댄서들 사이에서는 이미 세계적인 스타가 됐다. 이들의 공연 동영상은 전 세계 스윙댄서들의 분석 대상이다. 미국의 스윙댄서이자 칼럼니스트인 칼 넬슨의 평을 들어보자. 그는 자신의 블로그에서 "이들은 데뷔 공연을 통해 스윙댄스(린디홉)와 단체 공연을 새로운 경지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이후 공연으로 안무의 기준을 넘어서 버렸다"고 극찬했다. 단체 공연에서 중요한 공간을 창조적으로 사용하고 환상적인 음악 해석(musicality)이 '전위적(아방 가르드)'이라는 이유에서다.
이번 행사를 주관한 최나영(29)씨는 "실버 섀도우스는 린디홉을 통해서 요즘 젊은이들의 감성을 잘 표현한다. 폭발적인 스타일, 친숙한 이미지 때문에 한국 스윙댄서들이 동경하는 것 같다"고 분석했다. 미국인 숀 포터(일본 도쿄 거주·스윙댄스 강사)씨는 "완벽하고 놀랍다. 동영상으로만 보다가 직접 보니 저렇게까지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이 믿을 수 없을 정도"라고 평했다.
우리는 행복한 순간을 '꿈만 같다'고 표현한다. 스윙 댄서들에겐 이번 행사가 바로 그런 시간이었다.
◆린디홉, 스윙댄스의 다른 이름
스윙댄스는 스윙재즈에 맞춰 춘다. 스윙재즈(Swing Jazz)는 1920년대 말 미국의 경제공황 시대에 탄생했다. 스윙재즈의 빠른 박자와 경쾌한 리듬은 궁핍한 생활에 신음하던 미국인에게 희망과 의욕을 돋우었다.
스윙재즈의 날렵한 느낌은 흑인들의 강인한 육체를 통해 아름다움으로 승화됐다. 정신 없을 정도로 플로어를 누비다가도 어느새 댄서들의 몸은 공중을 날았다. 스윙댄스의 대표적인 춤은 '린디홉(Lindy Hop)'이다. 대서양을 비행기로 횡단한 찰스 린드버그처럼(Lindy) 훌쩍 뛴다(Hop)고 해서 연유된 이름이다. 스윙재즈는 그렇게 한 시대를 풍미했다. 그리고 2차 세계대전을 전후로 로큰롤 등 새로운 음악의 등장에 왕좌를 내줬다.
린디홉은 1980년대 말 극적으로 부활했다. '스윙댄스계의 대부' 프랭키 매닝을 찾아낸 이후였다. 그리고 1999년 한국에 지터벅이라는 춤이 소개되면서 한국의 젊은 춤꾼들은 스윙의 세계로 빠져들었다. 그로부터 9년 후 한국은 이제 아시아 스윙댄스계의 맹주가 됐다. 서울에서만 1주일 내내 스윙음악을 트는 스윙댄스 바(Bar)가 10개가 넘어섰다. 전국적으로 스윙댄스 동호회도 30여개, 동호인도 6천~7천명(국내 최대 스윙댄스 동호회 카페 등록회원수 기준)에 달한다.
행사를 마친 뒤 실버 섀도우스는 그림자처럼 미국으로 사라졌다. 스윙댄서들은 일상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이들에게 3일간의 짧은 만남은 한국 스윙댄스의 역사를 새로 쓴 혁명의 한 페이지로 기록될 것이다.
글·사진 조문호기자 news119@msnet.co.kr
▨스윙댄스란?
1920, 30년대 미국에서 유행했던 8박자 스윙재즈에서 맞춰 추기 시작한 춤의 양식이다. 지난해 드라마 '경성스캔들'(KBS2 TV)에서 주인공들이 춰서 많이 알려졌다. '스윙키즈(Swing Kids·1993)' 등 다수의 할리우드 영화에서도 볼 수 있다. 린디홉(Lindyhop)을 비롯해 찰스턴(Charleston) 발보아(Balboa) 블루스(Blues) 쉐그(Shag) 등 다양한 형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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