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이장님] 김천 부항면 신옥리 이장 문첩남씨

"부항댐 건설로 삶의 터전 수몰 이주하는 주민보면 마음 착잡"

"면장과 지서장 빼고는 안써본 감투가 없지요…."

김천 부항면 신옥리에서 31년간 마을 일을 맡아온 문첩남(63) 이장. 그는 요즘 착잡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 부항댐 건설로 마을이 물속에 잠기게 됐기 때문이다. 졸지에 실향민이 되어 한가족처럼 동거동락하던 이웃들이 하나 둘 이주를 하고 평생 일구던 논밭과 집이 통째로 사라지는 광경을 보면서 삶의 무상을 실감한다.

밤나무 숲이 무성한 밤시마을(20가구)과 동네가 산봉오리 모양인 옥소마을(18가구) 등 주민 100여명과 애환을 함께 해 온 문 이장과의 만남은 순탄하지 않았다. 야산 곳곳에서 대형 포클레인과 굴착기 굉음이 요란하고 공사 차량 100여대가 쉼없이 드나드는 부항댐 공사현장 일대 도로는 온통 진흙탕이었다.

이미 이주를 끝낸 밤시마을 주민들의 삶의 터전이던 문전옥답은 중장비에 밀려 사라졌고, 철거를 앞둔 농가 주택들도 폭격을 맞은 듯 폐허로 변했다. 그러나 30여분간 험한 공사장길을 가로질러 도착한 신옥리 옥소마을은 따스한 봄햇살을 간직한 전형적인 우리네 농촌이었다.

허름하고 비좁은 경로당에 모여 있던 노인네들 사이에서 문 이장이 "먼길 오느라 고생 많았다"며 반갑게 달려나왔다. 그는 '젊은 사람이 마을 일을 돌보라'는 주민들의 권유로 30세 때인 1975년 자신의 표현 그대로 '멋모르고' 이장을 맡았다고 한다.

"젊은 혈기만 믿고 내가 사는 옥소마을과 2km 떨어진 밤시마을을 오가며 2년동안 열심히 뛰었지만, 돌아온 건 좌절감 뿐이었지. 마을도로 포장 등 새마을 사업도 많이 했으나, 오랜 앙숙이던 두 마을이 사사건건 충돌하는 바람에 홧김에 사퇴를 해버렸어요."

그러나 주민들은 "자네밖에 할 사람이 없다"고 강권했고, 다시 이장을 맡은 그는 주민 개개인의 '성향'부터 파악해 들어갔다고 한다. 한 동네에 살더라도 그 전에는 미처 알지 못했던 개개인의 습성을 모두 파악해 요즘말로 '인적 네트워크'를 구성하고, 행정기관에서 농로포장 등 마을 개발사업이 내려오면 옥소와 밤시마을에 번갈아 시행하는 '탕평책'을 썼다는 것이다.

때로는 주민들을 무마시키기 위해 '내 돈을 써서라도 다음에 마을 안길을 포장하겠다'고 약속한 뒤 부항면사무소를 상대로 줄기차게 민원해결을 요청해 성사시키는 방식으로 주민 신뢰를 얻어나갔다. "이장도 좋은 의미의 정치가입니다. 주민 의견을 충분히 수렴하고 순리로 조정하는게 그 역할 아닙니까." 그의 '이장론'이다.

현재 신옥리 주민 중 밤시마을 20가구는 전원 이주를 끝냈고 옥소마을 18가구 중 15가구도 늦어도 내년 상반기까지는 이주를 해야한다. 보상금으로 인근 김천 봉산면과 감천면에 토지 4만3천여㎡를 대토한 문 이장은 "평생 짓던 농사를 그만두면 온 몸이 쑤실 것 같아 거기서도 농사일은 계속할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주민들이 모두 무사히 이주할 수 있도록 뒷수습을 다하고 난 다음에야 정든 고향을 떠날 예정이다. 문 이장은 부항댐 건설계획이 확정된 4년 전 사진 기술을 익혀 신옥리의 사계절을 카메라에 담고 있다. 요즘은 매일 아침 산에 올라 하루가 다르게 모습을 잃어가는 고향 산천을 촬영하기에 여념이 없다.

또 주민들의 손때가 묻은 탈곡기와 지게 등 농기계와 가재도구도 사들이고 있다. 이주하는 자신의 집에 비치해 뒀다가 실향의 아픔을 달래기 위해서다. 부항댐건설단에는 망향의 동산을 건립해 줄 것을 요청해 놓았다. 서울 대구 등지로 떠난 5가구를 제외한 대다수 마을 주민들은 김천에서 거주할 것으로 예상돼 한 달에 1번씩 모임도 가질 계획이다.

문 이장은 이제 이장으로서 아무런 권한도 없다. 토지보상과 이주비 수령 등으로 주민들의 농지원부가 없어 농로포장과 특작사업 신청 대상에서 제외됐고, 산불감시와 도로 잡풀제거를 하는 공공근로 등에서도 배제됐기 때문이다.

그러나 토지보상비 지급에 따른 친·인척간 법적다툼으로 법원에 증인으로 나서는 일이 잦다. "평소 잘아는 분들인데 법정에서 잘못 얘기하면 원수 되기 일쑤"라는 그는 "'증인으로 나가지 말라' '있는대로 얘기해 달라'는 등의 요청으로 괴롭지만, 이장 오래한 죄로 여긴다"며 씁쓰레한 웃음을 짓는다.

문 이장은 면사무소를 집 문턱 드나들듯 출입하며 공무원들과 친분을 쌓아 김천시청 공무원 박세환(36) 서차석(37)씨를 각각 사위로 맞았다. 두사람은 부항면에서 근무를 하다 문 이장 눈에 들어 사위가 됐다.

방위협의회장, 체육회장, 바르게살기협의회장, 농악단장, 조합이사, 초교육성회장 등을 역임하며 부항면에서 마당발 이장으로 살아온 그는 "새로 정착하는 곳에서 또 이장을 맡을 계획이냐"는 질문에 "남은 여생은 어려운 이웃을 위해 봉사하며 지냈으면 한다"고 말했다.

김천·강병서기자 kbs@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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