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 섬 너머로 해가 지고 있었다. 바다는 내항 깊숙이 부풀었다. 해 지는 쪽 하늘에서 붉은 노을과 검은 노을이 어지럽게 뒤엉켰다. 내일은 비가 올 모양이다. 일찍 자리에 누웠다. 어깨가 결리고 식은땀이 흘렀다.(김훈, 부분)
아직 섬은 보이지 않았다. 마산에서 14번 국도를 타고 진동을 지나 고성 방향으로 향했다. 통영이 목적지였으나 고성에 당항포 국민관광단지가 개발되어 있다는 풍문에 당항포에 들르기로 했다. 따스한 햇볕과 곳곳에 피어난 아름다운 꽃들로 마음이 가벼웠다. 마침내 도착한 당항포 국민관광단지. 거대한 주차장은 사람으로 넘쳤다. 자유롭게 바다로 드나들던 길은 여러 시설물들이 들어서면서 막혀 있었다. 입장료도 받고 있었다. 답답했다. 하지만 바다는 여전히 맑고 아름다웠다. 잔잔히 밀려드는 투명한 물결 위에 가을 햇살이 떨어져 영롱히 빛나고 있었다. 어깨가 결리고 식은땀이 흘러 쉽게 잠을 이루지 못하던 통제사를 생각하자 가슴 시린 슬픔이 가득 차올랐다. 바다를 낀 해안 산책로를 파도 소리와 함께 걸었다. 파도 소리에는 핏빛이 담겨 있었다.
잘려진 단면에서 힘살과 실핏줄이 난해한 무늬를 드러냈다. 붉은 살의 결들이 어디론지 흘러가고 있다. 칼이 베고 지나간 목숨의 안쪽에 저러한 무늬가 살아 있었다.(김훈, 부분)
두 차례에 걸쳐 57척의 왜선을 침몰시킨 승리의 땅, 여기 당항포에 와서까지 난 여전히 쓸쓸하다. 전승 기념탑으로 올랐다. 거북선 모형의 대형 기념탑이 오히려 쓸쓸했다. 통제사의 정신이 담긴 여기가 단지 관광단지로만 기억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 목이 말랐다. 당항포해전관에 들어갔다. 그곳에서 월아의 숨은 이야기도 들었다. 기녀였던 월아는 왜란 전에 일본에서 조선 정세를 정탐하고 지도를 작성하러 온 첩자의 정체를 알고 그가 술에 취해 잠든 사이에 품고 있던 지도에 가필을 하여 당항포 바다가 반대쪽으로 열려 있는 것처럼 그려 넣음으로써 통제사의 승리에 크게 기여했다. 해전관 벽에 새겨진 글귀에 오래도록 머물렀다. '三尺誓天 山河動色 一揮掃蕩 血染山河'(석 자 칼로 하늘에 맹세하니 산하의 색이 변하는도다. 한번 휘둘러 쓸어 없애니 강산이 피로 물드는구나.)
임진년에 임금은 자주 울었고, 장려한 교서를 바다로 내려보냈으며 울음과 울음 사이에서 임금의 칼날은 번뜩였다.(김훈, 부분)
숭충사로 올랐다. 방명록에 부끄러움만 담긴 내 이름 석 자를 남기고 통제사 영정 앞에서 향을 피우며 절을 올렸다. 7년 전쟁으로 황무지가 된 강산, 상처만 남은 백성들, 적과 싸우다 죽는 것이 아니라 임금의 칼에 죽어가는 장수들, 왜적과 야합하는 내부의 적인 명군, 끝내 내부의 적에게 칼을 겨눌 수 없었던 통제사. 통제사가 지녔을 삶의 허망함에 다시 쓸쓸했다. 하지만 거기에도 길은 존재했다. 길은 바다로 향해 있었다. 통제사와 함께 했던 길의 향기와 사람들의 소리에 목이 메었다. 눈 아래에 펼쳐진 당항만의 색에 눈이 아렸다. 섬이 거기에 있었다. 찰나에 깨어질 풍경이지만 그래도 마냥 그 속에 살고 싶었다.
숭충사 앞에 어렵사리 꽃망울을 맺은 배롱나무 한 그루에 눈이 머물렀다. 나라를 위하는 장수를 잡아다가 주리를 트는 시절과 별반 다를 것도 없는 현재의 시간도 여전히 거기에 존재했다. 400여년이 흘렀지만 달라지지 않는 사람들 사는 모습이 참으로 쓸쓸했다. 하지만 적의 칼날과 내부의 칼날에 맞서 자신의 칼의 노래를 부를 수 있었던 통제사는 그 절망마저도 아름다웠다. 절망을 회피해서는 안 된다. 절망은 희망을 부를 수 있는 유일하고도 절실한 감정이기 때문이다. 사당 앞에는 통제사의 절실한 목소리 한 구절이 새겨져 있었다. '此讐若除 死卽無憾'(이 원수를 무찌른다면 죽어도 여한이 없겠습니다).
한준희(경명여고 교사)
댓글 많은 뉴스
이재명 90% 득표율에 "완전히 이재명당 전락" 국힘 맹비난
권영세 "이재명 압도적 득표율, 독재국가 선거 떠올라"
이재명 "TK 2차전지·바이오 육성…신공항·울릉공항 조속 추진"
이재명, 민주당 충청 경선서 88.15%로 압승…김동연 2위
전광훈 "대선 출마하겠다"…서울 도심 곳곳은 '윤 어게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