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키아벨리 '군주론'의 실제모델 체사레 보르자. 그는 아버지 로드리고 보르자와 그의 정부 사이에서 1475년 태어났다. 아버지 로드리고 보르자는 후에 교황 알렉산데르 6세로 선출된다.
체사레 보르자는 당시 이탈리아에서 가장 잘생긴 남자로 평가받는다. 동시에 차갑고, 무자비하고, 예측할 수 없고 위험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게다가 그는 의심이 많았고 복수의 화신이었다. 여동생 루크레치아 외에 누구도 사랑하지 않았으며 사생활을 철저히 숨겼다. 사람들 앞에 나설 때는 가면을 자주 썼다.
체사레는 야망과 권력욕으로 똘똘 뭉친 사람이었다. 아버지인 교황 알렉산데르 6세의 후원으로 추기경이 됐지만 환속해 정치 한복판에 뛰어들었다. 권력을 장악하기 위해 여동생을 이혼시키고, 유력한 가문의 남자와 재혼시켰다. 교황군 총사령관이 된 그는 로마냐 일대를 정복해나가면서 27세에 이탈리아의 새로운 권력자로 떠올랐다.
체사레는 각종 살해사건, 납치, 독살, 성직매매 등 여러 스캔들에 연루된 악마적 인물로 평가받는다. 그의 야심은 갈수록 커졌고, 사람들은 그의 야심에 위협을 느꼈다. 이탈리아 정치체제에 대한 그의 위협은 충격과 분노를 낳았고, 이 충격과 분노는 그를 '악의 본보기' '위험한 아웃사이더'로 인식하게 했다.
1502년 마키아벨리는 피렌체의 외교사절로 로마를 방문, 체사레를 1503년까지 옆에서 지켜보았다. 이때 마키아벨리는 체사레에게서 강력한 군주의 모습을 보았다. 1513년 집필된 '군주론'은 메디치가의 신생 군주가 어떻게 정치권력을 획득, 유지, 확대할 수 있을까 조언하기 위해 구상됐는데 체사레가 그 모델이다.
체사레는 살인, 강간, 근친상간, 약탈, 반역 등의 죄목으로 고소되기도 했다. 그의 죄목은 부친인 교황이 당한 고소내용과 대부분 동일했다. 그의 죄목이 모두 사실은 아니지만 어느 정도는 사실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같은 죄목이 교황인 아버지와 아들 체사레만의 특성은 아니었다. 표리부동과 음모, 암살과 전쟁은 당시 이탈리아 정치파벌들 사이에서는 흔한 일이었다.
역사는 오랫동안 체사레를 악의 화신으로 규정했다. 지은이는 이런 평가의 이유를 '체사레 보르자가 이탈리아가 아닌 스페인 혈통이라는 점과 위험한 성격, 바닥을 알 수 없는 야망에서 기인했다'고 본다. 당시 이탈리아 사람들은 외국인을 경멸했는데, 특히 스페인 사람을 가장 싫어했다. 스페인 태생으로 교황으로 선출된 체사레의 아버지와 승승장구하는 그 아들에 대한 적대감은 굉장했다.
책은 체사레가 동생 후안과 매제를 암살했다는 증거는 없다고 밝히고 있다. 다만 동생 후안이 죽고 일년이 지난 뒤 체사레가 어느 정도 이익을 봤다는 점, 여동생 루크레치아의 애정이 후안에게 쏠리는 것을 질투했다는 정황증거가 있을 뿐이라고 말한다.
어쨌든 체사레가 동생을 죽였다는 소문이 돌았고, 피렌체의 역사가 구이차르디니는 이 소문에 윤색을 더해 역사서에 남겼다. 그 기록이 지금까지 전해지면서 체사레의 악명을 드높였다.
체사레는 악마이며 영웅이었다. 그는 프랑스의 침공과 스페인의 압력 등 열강의 틈바구니 속에서 뛰어난 정치적 역량을 발휘했다. 그는 거침없는 정복자였고 뛰어난 통치자였다. 가까운 사람들에게 공포를 주었으며 헌신과 충성을 끌어낼 줄도 알았다. 이탈리아 군주들은 그를 증오하고 두려워했으며 불신했다. 그러나 체사레의 추종자들은 결코 그를 배신하지 않았다.
체사레는 뛰어난 정치도박사였다. 그는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았다. 기회를 알아보는 능력이 뛰어났고 기회를 이용하는 능력도 뛰어났다. 위험에 압도당하기 전에 위험을 감지할 줄 알았고, 언제 손을 털고 일어나야 하는지도 알았다. 군사 지휘관의 필수요소인 신중함, 조심성, 영리함, 대담함도 갖추었다.
그는 결코 타인을 믿지 않았지만 자기 자신을 무모할 정도로 믿었다. 사람들은 그를 폭군이라고 규정했지만 그는 스스로 '폭군을 제거할 사람'이라고 규정했다. '체사레(Cesare)'는 라틴어 '카이사르(Caesar)'를 이탈리아어로 읽은 발음이다. 체사레는 자신과 율리우스 케사르를 동일시했다. 자신을 불굴의 '황제'라 여긴 것이다.
체사레는 자신이 정복한 지역 시민을 정중하게 대했다. 지방 관리들도 대부분 기존 직위에 재임명했다. 마키아 벨리가 나중에 지적하듯 이 점은 백성들이 그에게 충성을 바치는 중요한 요인이었다.
거침없이 질주하던 체사레는 아버지가 죽고 교황 율리시스 2세가 등극하면서 위기를 맞는다. 정복지와 병력을 잃었고 스페인의 라 모타 성에 감금됐다. 그곳에서 탈출한 그는 이탈리아 무대 복귀를 위해 고군분투했지만 결국 서른한살의 나이에 요절했다. 폭우가 쏟아지던 날 적의 공격으로 스물다섯군데 상처를 입고, 거친 들판에서 비참하게 죽은 것이다.
체사레는 1507년 죽은 뒤 스페인 북부 비아나 지역의 산타마리아 교회에 묻혔다. 그러나 1527년 '죄인을 교회에 묻을 수 없다'는 교회의 반발로 무덤은 파헤쳐지고 유해는 길가에 묻혔다. 2007년 스페인의 한 대주교가 시청에 있는 그의 무덤을 교회로 이장토록 허락했는데 체사레가 죽은 지 500년이 지난 후였다.
체사레는 이탈리아 통일을 꿈꾼 젊은 군주였으며, 극단적 야망과 승부욕, 본능적 정치감각으로 세력을 키워나갔다. 이 책은 그의 일생에 관한 이야기이며, 역사가 그를 그렇게 오랜 세월 탄핵해온 이유를 밝히고 있다. 10컷이 넘는 초상화와 100컷의 시각자료들이 읽는 재미를 더한다.
'카이사르(황제) 아니면 무(無)'
체사레가 자신의 운명을 예언한 금언이다. 이 간단한 말은 그가 어떤 사람인지 분명하게 보여준다. 688쪽, 2만6천원
조두진기자 earful@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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