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일 오전 10시쯤 회사원 장모(55·대구 달서구)씨는 이동통신사 직원이라는 여성의 전화를 받았다. "당신 명의가 도용돼 휴대폰 요금이 체납됐다. 곧 형사가 전화를 할 것"이라는 말에 이어 몇분 후 형사라는 남자가 전화를 걸어와 "은행 보안시스템을 재설정해야 하니 은행으로 가라"고 했다.
지시대로 현금인출기 버튼을 정신없이 누른 장씨는 오후 늦도록 아무런 연락이 없자 계좌를 다시 확인한 결과 1천만원이 인출된 것을 발견했다. 말로만 듣던 '보이스 피싱(Voice Pishing·전화를 통해 개인정보를 빼내 사용하는 범죄)'이었다.
그는 "돈을 보내라는 말은 한마디도 없었다. 사기라고 의심하지 못했다"고 혀를 찼다.
◆'알아도 속는다' 진화하는 보이스 피싱
경찰의 대대적인 단속과 피해자 속출에도 불구하고 숙지기는커녕 보이스 피싱 수법은 더욱 교묘해지고 대담해지고 있다. 돈을 돌려준다는 '환급 빙자형' 수법이 더 이상 통하지 않자 이제는 동창회·종친회 핑계를 대거나 자녀를 납치했다고 협박해 돈을 뜯어내고 있다.
서울경찰청에 따르면 2006년 6월부터 올해 2월까지 전국에서 발생한 보이스 피싱 범죄는 총 5천702건. 확인된 피해 규모만 560여억원에 달한다.
보이스 피싱 사기 조직은 더욱 전문화되는 양상이다. 이들은 기업처럼 '총책', 전화를 거는 '콜센터', '대포 계좌 개설팀', '현금 인출팀' 등 분업화된 조직을 갖추고 있다. 이 때문에 돈이 인출되는데 걸리는 시간은 30초가 채 되지 않는다. 경찰이 추적해도 돈을 인출한 계좌와 통장은 바로 폐기하기 때문에 범인을 붙잡기 어렵다.
또 수화기에서 흘러나오던 어눌한 한국말이 사라지고 세련된 말투로 바뀌고 있다. 달서경찰서 예종원 지능1팀장은 "과거 중국 연변에서 주로 활동하던 조직들이 수사를 피해 최근 대만과 홍콩 등지로 넘어가면서 서울말투를 훈련시키고 있다"고 전했다.
보이스 피싱 사이트를 통한 '파밍(Pharming·개인정보를 훔치는 컴퓨터 범죄)'도 신종사기 수법이다. 사이트 도메인의 철자를 한자씩 바꾸거나 '.net'을 '.com' 등으로 바꿔 만든 피싱 사이트는 개인 정보를 훔쳐 돈을 인출하는 수단으로 악용되고 있다. 지난달 이모(32·달서구 상인동)씨는 '연체 체납요금 통보'라는 메일을 받고 링크된 은행 사이트에 접속해 회원 가입을 한뒤 15만원을 송금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사이트가 은행 도메인과 철자 하나만 바뀐 파밍 사이트였다.
◆보이스 피싱, 이렇게 당한다
현재 큰 피해를 보이고 있는 대표적인 보이스 피싱 수법은 사칭형, 납치가장형, 휴대전화 문자메시지형 등 세가지다.
사칭형 사기는 국세청, 국민연금관리공단, 건강보험공단, 이동통신사 등을 사칭해 세금이나 보험금을 돌려준다, 명의가 도용당했다며 현금지급기로 유인해 돈을 빼간다.
납치가장형 사기는 가족의 휴대전화 번호를 미리 파악해 자녀와 연락이 되지 않는 상황을 만든 뒤 '가족을 납치했으니 몸값을 입금하라'며 절박한 상황을 유도해 피해자를 협박한다. 지난 12일 서울, 13일 대구 등에서 잇따라 일어났다.
휴대전화 문자메시지 사기는 동창회나 종친회 등에서 연락처를 입수, 회원들에게 돈을 빌려달라는 문자메시지를 보내는 방식이다. 이 수법은 주변인물의 신상까지 알고 동창생 등 지인의 진짜 전화번호로 발신번호를 남기는 탓에 더 속기 쉽다.
금융감독원은 "전화로 계좌번호나 카드번호, 주민번호 등 개인 정보를 요구하거나 현금지급기를 이용해 세금이나 보험료 환급, 등록금 납부 등을 해준다는 안내에 일절 대응하지 말라"며 경보를 발령한 상태다.
돈을 이체한 경우 즉시 거래은행에 지급정지 신청을 하고, 개인정보를 알려준 경우에는 바로 은행이나 금융감독원에 신고해야 한다. 발신자표시가 없거나 001, 008, 030, 086 등 처음 보는 국제전화번호도 의심해야 한다.
임상준기자 zzuny@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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