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마니아와 함께 떠나는 세계여행]주몽의 나라 '환인'

위풍당당했던 고구려의 혼은 어디로...

주몽이 동부여의 땅 길림에서 송화강을 거슬러 남하해 온 곳은 지금의 환인 땅 비류수 강가였다. 2천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은 만주족 자치현으로 바뀌었다. 즉 2천년 전 고구려 후예들은 다 어디로 가고 중국 마지막 왕조 청나라를 건국했던 후예, 만주족의 터전이 됐단 말인가.

인천 국제여객선터미널에서 한중합작으로 운영중인 '동방명주호'에 몸을 싣고 12시간 만에 북한의 신의주 맞은 편 단동에 도착했다. 단동의 압록강에는 이성계가 고려를 무너뜨리고 조선을 세우기 위해 말머리를 돌린 현장으로 유명한 위화도가 세월의 풍상에도 말없이 떠 있었으며, 6.25 당시 중공군의 침입을 막기 위해 미군이 폭파해버려 반쯤 남은 부서진 철교 역시 아픈 역사를 되뇌이게 해주었다.

단동에서 6시간 남짓 시외버스를 타고 산 넘고 물 건너기를 수십 번 반복하며 도착한 곳은 바로 환인땅. 환인 시가지에 접어드는 순간 주몽이 대고구려를 건국한 왕도(王都) 오녀산이 한눈에 들어왔다. 고구려의 수도는 평지가 아닌 병풍처럼 깎아지른 절벽 위에 터를 잡았던 것이다. 그 아래 푸른 고등어가 살아서 푸들푸들거리는 듯한 비류수는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장관이다.

백두산은 알아도 오녀산을 잘 모르고 있듯 누가 이곳이 고주몽이 대고구려를 세운 첫도읍이라는 것을 알겠는가. 이렇게 나는 누가 시키지도 않았고, 누구의 부름도 받지 않았는데 이곳을 찾았다. 비류수는 지금 중국 지명 표기로는 혼강이다. 몇년 전 중국 정부에서는 동북공정을 감행하며 '오녀산 산성'이라는 비석 마저 과거의 것을 버리고 새로 단장해 세웠다. 더욱이 가슴 이픈 것은 우리 민족·조상의 터전이던 그 이름들이 모두 중국 역사 현장의 지명으로 뒤바뀌고,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뒤에는 새롭게 날조된 안내 비문이 중국의 얼굴인냥 세워져 있다.

해질무렵 혼강에 앉아서 병풍처럼 우뚝 솟은 오녀산 정상을 바라보노라니 바람에 흔들리는 풀꽃대궁처럼 온갖 마음의 편린들이 사르르 물결치기 시작했다. 어디서 나왔는지 초승달이 한국 땅에서 온 나를 반겨주는 듯해 위안이 되기도 했지만 계속 머물지 못하고 떠나야 하는 처지라 아쉬움이 남았다. 비류수는 남쪽으로 흘러 고구려 제2의 도읍인 집안(集安)에 이르러 압록강과 합류하게 된다.

이튿날 새벽 눈 뜨자 마자 어둠을 뒤로 밀치고 오녀산으로 향했다. 어둠이 가시기 전이었는데 새벽 하늘에는 샛별이 하나 떠서 상서롭게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1천600년 전 집안(集安)땅의 고구려 고분벽화에서 부활한 듯 검은 까마귀가 나타나 길을 먼저 열어주었다. 점점 가까이 다가갈수록 병풍을 두른 듯한 거대한 바위군상은 위풍당당하게 버티고 있었다. 999개의 가파른 돌계단을 통해 넓디넓은 정상에 오르니 대고구려의 흔적은 아무것도 없었다. 시조왕(주몽왕) 사당이 있었던 자리 조차도. 고구려 역대 왕들이 왕위에 오르면 이곳에 와서 시조 주몽왕에게 참배했다고 한다.

깎아지른 절벽 아래로 굽어보이는 산맥들과 고구려의 젖줄인 비류수 물결이 한눈에 들어왔다. 이같이 웅대한 자연경관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일대는 장관이다.

산길을 돌아 조금 내려간 지점에 조그만 호수가 하나 보였다. 이 높은 산정에도 물이 고여있는 것이 신기하기만 했다. 붉은 글씨로 '천지(天池)'라는 이름이 각인된 비석이 이곳을 지키고 있다. 백두산의 거대한 '천지'와 같은 이름으로 '천지(天池)'가 존재한다는 사실에 놀랐다. 돌아 나오는 길에 버려진 큰 맷돌은 2천년을 잠에서 아직 깨어나지 않고 있는 것 같았다.

오녀산은 고구려 제1의 산성으로도 유명한데, 역시 오래전 오랑캐를 무찌르다 장렬하게 전사한 중국 다섯 여장군의 공적을 빗대어 홀승골성 서성산이 '오녀산산성(五女山山城)'으로 바뀐 것이다. 환인 시가지 삼거리에는 하늘을 찌를 듯한 오녀동상이 서있다. 고구려 건국 이전에 일찌기 해모수가 하늘에서 오룡거를 타고 내려와 당도했던 것으로도 전해지고 있는데 우리 민족에게는 아주 신성시 돼야 하는 성역이다. 고주몽 또한 이곳 오녀산 정상에 도읍을 정했으니, 백두산이 민족의 영산(靈山)이라면 오녀산은 민족의 성산(聖山)인 것이다.

제19대 왕인 광개토대왕비에도 '시조 추모왕(주몽)께서는 북부여 출신으로 부여의 엄리대수를 건너 비류곡을 지나 홀본 서성산 위에 도읍을 정하시다' 라는 글이 나온다. 바로 그 홀본 서성산이 지금의 오녀산성이다. 홀승골성인 이곳 산정에 기원전 37년(BC 58년이라는 설도 있음) 고주몽이 고구려의 첫 도읍을 정해 18년간 집정했으며, 제2대 유리왕 21년까지 통치한 그 역사의 현장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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