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세계에 온 것을 환영한다(Welcome to the real world)."
모피어스가 앤더슨에게 한 말이다. 네가 살던 곳은 가짜고 이것이 진짜다. 네가 다니던 직장도 가짜도, 네가 만나던 사람도 가짜고, 네가 살던 집도 가짜고, 무엇보다 너 또한 가짜였다. 이제 진짜 세상을 만나보자.
1999년 세기말적 연대에 태어난 '매트릭스'는 2003년까지 '리로디드' '레볼루션' 등 세 편의 연작이 소개되면서 디지털의 21세기를 화려하게 열었다. 액션과 인식, 오락과 철학, 판타지와 현실을 절묘하게 곁들인 먹음직한 시리즈물이었다.
멀쩡하게 직장 잘 다니는 총각에게 후줄근한 사람들이 접근한다. "어이! 진짜 세상을 맛볼래?" 마치 길을 걷다 겪는 '도(道)를 믿습니까' 식의 당혹감이 밀려든다. 거기다 진짜 세상이란 것이 비루하기 짝이 없다. 우주선도 낡고, 복장도 노숙자 스타일에 장비들도 구시대적이다. 차라리 세련된 가상현실 속에서 사는 것이 더 편하겠다. 가공된 것이든, 기계의 에너지원이든 어차피 기억되는 것이 곧 존재하는 것 아닌가.
'매트릭스'가 범상한 SF가 아닌 것은 바로 여기에 있다. 존재에 대한 인식의 계단을 뛰어넘은 것이다. '내가 나비가 된 것인지, 나비가 내가 돼 꿈을 꾼 것인지'라는 장자의 나비의 꿈(胡蝶之夢)을 워쇼스키 형제가 21세기형 SF로 제시한 것이다.
시인 이규리는 '파란 비'에서 '나라고 믿었던 나는 정말 나인가'라고 묻고 있다. 천개의 꽃이 피어나는 가상 세계, 쏟아지는 비, 그 물결에 쓸려 들어간 나는 과연 나인가.
'파란 비'는 커다란 솥에 들어가는 국숫발을 형상화하고 있다. 솥은 수제비 뜨듯 시간을 던지고 기억을 건져 올리는 가상공간이고, 국숫발은 디지털 정보이다.
'매트릭스'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이 초록빛 스크린에 흘러내리는 글자들이다. 서서히 흘러내리던 글자들이 화면을 꽉 채우면 의식마저 흠뻑 젖어드는 착각이 든다. 가공할 이미지다. 시인은 물질계와 정신계를 아우르는 물아(物我)의 세계를 국숫발 같은 푸른 비로 흠뻑 적셔놓는다.
흥미로운 것은 '파란 비'다. 영화에선 0과 1을 뜻하는 초록의 문자가 쏟아진다. 시인이 굳이 파란으로 변형시킨 것은 왜일까. 알다시피 파란은 좀 더 밝은 이미지의 색이다. 파란 수염, 파랑새 등 청색이 들어가면 꿈과 희망이 엿보인다. 초록으로 대변되는 영화 속 끔찍한 가상의 현실을 좀 더 긍정하려는 의도는 아닐까.
화가 손파는 두개의 작품을 연결시켰다. 초록 바탕에 나선형의 고무줄을 X자로 걸었고, 아래에는 직선들이 중첩된 이미지를 붙였다. 중첩된 직선은 매트릭스가 수학적으로 행렬을 뜻하는 것을 보여주고 있고, 3차원적인 것은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는 영화 속 이야기들을 풀어준 것이다.
나선형의 고무는 총알이 지나가는 흔적이다. 앤더슨(네오)이 탄흔의 궤적을 그리며 날아오는 총알을 시간을 초월해 피하는 것은 유명한 장면이다.
작품 속 나선형 고무는 또한 전화선을 닮기도 했다. 영화에서 가상을 벗어나 현실로 돌아올 수 있는 유일한 통로는 전화선이 있는 구식 전화이다. 이는 아날로그와 디지털의 맞대결을 극단적으로 표현한 장치다.
시인은 '수제비를 뜨듯 시간을 던지고 기억을 던지네'라고 쓰고 있다. 초록 매트릭스 안에서 한쪽 끝에서 반대로 던지는 수제비. 그 모양이 화가가 형상화한 고무재질의 나선형과 절묘하게 맞아떨어지고 있다.
인터넷이란 가상공간은 지구의 5.1억km²인 지구의 면적으로 무한대로 키워놓았다. 말하자면 단칸방을 대저택으로 키워놓은 것이다. 그러면서 실제와 가상공간뿐 아니라 인간의 존재에 대한 의문도 확장시키고 있다.
당신의 real world는 어디인가?
김중기기자 filmtong@msnet.co.kr
▨ 매트릭스(The Matrix, 1999)
감독:앤디 워쇼스키, 래리 워쇼스키
출연:키아누 리브스, 로렌스 피쉬번, 캐리 앤 모스
러닝타임/등급:136분/12세 관람가
줄거리: 인간의 기억을 지배하는 가상현실, 매트릭스 2199년. 인간은 기계에 지배당하고 매트릭스 속에서 살고 있다. 가상현실을 현실로 느끼지만 몸은 기계의 에너지원으로 양육되고 있다. 이러한 현실을 깨달은 모피어스 등 몇몇 사람들만이 저항군으로 활동하고 있다. 그들은 평범한 사무원 토마스 앤더슨에게 접근한다. 그가 인간을 구원할 유일한 구세주 네오로 믿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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