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생 허벅지가 찢어져서 피가 철철 나요. 병원에 갔는데 우리 건강보험은 그 병원에서 쓸 수 없대요. 70만원 있어야 한대요. 동생이랑 울면서 그냥 왔어요. 전에 엄마가 병원 가기 힘들다고 운동 같은 거 하지 말라고 하셨거든요."
현재 이야기가 아니다. 건강보험 '당연지정제'가 폐지되고 민간의료보험이 활성화된 상황을 가정할 때 벌어질 수 있는 상황을 말한 것이다. 지금처럼 국민건강의료보험이 아니라 값비싼 민간보험에 가입해야 병원에서 치료를 받을 수 있고, 돈이 없다면 다치지도 아프지도 말아야 한다는 이야기다. 미국 민간의료보험제도의 폐해를 고발한 다큐멘터리 영화 '식코(SIKCO)'가 개봉하면서 인터넷이 후끈 달아오르고 있다. '4년 후 다음과 네이버 메인'이란 UCC(사용자 제작 콘텐츠)에서는 '병원비 아끼려 포경수술하던 중학생 응급실행' '아파트 없어도 민간보험 가입자면 일등신랑' '집에서 치질수술하던 50대 숨진 채 발견' 등의 가상뉴스가 등장한다. 만약 민간보험이 활성화하면 이렇게 될 수도 있다는 일종의 풍자이지만 마냥 웃고 있을 수만은 없다. '당연지정제 폐지'를 둘러싸고 논란이 벌어지는 이유를 알아보자.
◆이것이 당연지정제다
대한민국 국민은 태어나면서 건강보험에 자동 가입되고, 전국 모든 병·의원은 정당한 사유 없이 이들에 대한 진료를 거부할 수 없다. 재벌그룹의 회장이건 일용직 근로자이건 건강보험증만 있으면 전국 어느 병원에서든 진료를 받을 수 있고, 그것을 거부하는 병원은 의료법 위반으로 문을 닫거나 면허정지까지 받을 수 있도록 돼 있다. 이것이 바로 당연지정제다.
하지만 그동안 국민들이 당연하게 누려온 혜택을 못 받는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 정부가 의료산업화를 기치로 내세우며 '당연지정제 폐지'를 검토한다고 밝혔기 때문. 그렇게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그 답에 앞서 우리나라 건강보험료 부과체계부터 알아둘 필요가 있다. 건강보험료는 소득 및 자산에 따라 차등부과된다. 부자는 많이 내고 가난한 사람은 적게 낸다. 직장 가입자는 임금폭을 최저 월 28만원에서 최고 6천579만원으로 본다. 한달에 28만원을 못 벌어도 28만원을 기준으로 하고, 6천579만원보다 많이 벌어도 이 금액을 기준으로 한다는 말이다. 여기에 5.08%를 곱하면 월 보험료가 나온다. 최저 1만4천여원에서 최고 334만2천여원을 낸다. 235배 차이가 난다. 지역 가입자는 최저 점수가 20점, 최고는 1만1천점이다. 점수에 148.9를 곱하면 매달 내는 의료보험료가 나온다. 재산이 없어서 20점에 해당한다면 2천900여원을, 부자여서 1만1천점에 해당한다면 월 163만7천900원으로 550배 차이가 난다. 물론 부자들은 일년내내 병원 한번 안 가는데 보험료만 많이 낸다고 불만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이 우리나라 보건의료 서비스를 지탱하는 근간이다.
◆보험의 역선택 이론
유시민 전 보건복지부 장관은 이렇게 말한다. "만약 월 건강보험료 10만원도 안 내는 사람이 당연지정제 폐지에 대해 동의한다면 머리가 돌았거나 내용을 전혀 모르고 있는 사람이다." 자못 강경한 어조이지만 설명을 들어보면 수긍이 간다. 이른바 '역선택 이론'을 들어보자.
당연지정제가 폐지된다면, 즉 시설이 좋은 유명 민간병원이 국민건강보험공단 외에 한 민간보험사와 계약을 맺을 수 있게 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돈이 없어서 민간보험에 가입하지 못한 사람은 일단 이 병원에서 진료를 받을 수 없다. 반면 최상위 부자들이 민간보험사 의료보험 상품에 가입할 것이다. 나름대로 최상의 의료서비스를 누리고 싶을 테니까. 돈이 많아서 민간 보험에 가입하고, 좋은 치료를 받는다면 사실 아무 문제가 없다. 하지만 여기에는 전제 조건이 있다. 부자들이 국민건강보험과 민간보험에 동시에 가입해야 한다는 것. 양쪽에 다 보험료를 내준다면 국민건강보험의 재정이 흔들릴 이유가 없다.
하지만 그래서는 민간 의료보험 시장이 형성될 수 없다. 건강보험공단에 매달 수백만원 내는 것도 모자라 민간 보험사에 다시 수백만원을 낼 수 있는, 내려는 부자는 많지 않을 테니까. 민간 보험사가 고객을 확보하지 못하면, 의료기관도 굳이 민간 보험사와 계약을 맺을 이유가 없고 결국 '당연지정제 폐지'는 하나마나인 셈. 민간 의료보험을 키우기 위해서라도 국민들이 건강보험공단과 민간 보험사 중 하나를 택해서 가입할 수 있도록 제도를 바꿀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가령 건강보험 가입자가 100명이라고 할 때, 상위 5%에 해당하는 부자 가입자 5명이 민간 보험으로 옮겨가게 된다. 가입자 5명이 내는 보험료가 전체 보험공단 재정의 30%를 차지한다고 가정해보자. 5명만 빠져나가도 보험료 총액이 1천만원에서 700만원으로 줄어든다. 종전에는 1명당 10만원씩 보험료 혜택을 나눠가졌지만 이제는 1명당 7만3천원밖에 안 된다. 건보 재정이 악화되면 보험지급 범위는 줄어든다. 감기 치료비로 5천원이 아니라 1만원을 내야 한다는 말이다. 보험적용이 되는 진료항목도 줄어든다. 이렇게 되면 중산층들은 불만을 느끼게 된다. 차라리 민간보험이 낫다는 생각을 하고, 결국 95명 중 15명이 다시 빠져나간다. 중산층 부담 보험료를 30%라고 가정하자. 결국 가입자는 80명으로, 재정규모는 400만원으로 준다. 1명당 10만원이던 보험혜택이 5만원으로 줄어든다. 상황은 악순환을 거듭한다. 그나마 소득이 낫다는 사람들이 차례차례 빠져나가면서 결국 건강보험은 붕괴된다.
◆'시골의사'도 당연지정제 폐지에 반대
물론 우리나라에도 민간보험이 있다. 암에 걸리면 3천만원, 병원 입원시 하루에 2만원 하는 식으로 민간의료보험이 도입돼 있다. 하지만 이들 보험은 기존 건강보험을 보완하는 형태다. 이 상황에서도 문제는 자주 발생한다. 민간보험사가 뒤늦게 보험료 지급을 거부하면서 분쟁이 벌어지는 경우가 비일비재한 것. 보험소비자협회 김미숙 대표는 "우리나라 민간보험의 보험금 지급률은 60%로, 가입자가 100원을 내면 60원밖에 돌려받을 수 없으며 결국 보험 분쟁이 잇따를 수밖에 없는 구조"라고 했다. 반면 건강보험은 가입자가 100원을 내면 국고 보조금까지 110원을 돌려받는다.
시민단체 측은 당연지정제가 폐지되면 ▷의료서비스의 민영화 ▷병원비 상승 ▷빈부격차에 따른 의료서비스 양극화 ▷민영건강보험 비가입자의 병원 이용 어려움 등이 생긴다며 이를 강력히 반대하고 있다. 반면 보험업계는 "우리는 공적의료보험을 민영의료보험으로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공적보험이 담보하지 못하는 부분을 보완하자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시골의사'라는 필명으로 유명한 박경철(안동신세계연합클리닉 원장)씨는 자신의 블로그에 실은 칼럼을 통해 이렇게 밝혔다. "혹자는 '당연지정제가 폐지돼도 공보험과 계약을 맺은 병원들은 다수가 남아있을 것이고, 일부 의료기관들만 민간보험이나 일반시장으로 갈 것이다'라고 말한다. 터무니 없는 소리다. (중략) 살 권리만은 국가가 지켜야 한다. 병에 들어 죽어가면서까지 빈부가 갈려서는 안 되고, 뇌출혈로 쓰러져 앰뷸런스가 병원으로 달릴 때 그 안에서 '당신의 의료보험은 어떤 색깔입니까?'라는 질문을 받는 대한민국 국민은 한사람도 있어서는 안 된다.'
미국에서는 의식을 잃고 쓰러져서 앰뷸런스를 탔다가 보험금 지급을 거부당한 사례도 있다. 보험사 측은 왜 사전에 앰뷸런스 이용 동의를 받지 않았느냐고 주장한다. 의식을 잃은 환자가 잠시 깨어나서 휴대폰으로 보험사에 이렇게 전화해야 하는 걸까? "저 지금 의식을 잃고 쓰러지려고 하는데 당신 보험사에서 제공하는 앰뷸런스 서비스를 이용해도 될까요?"
김수용기자 ksy@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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