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 제목만 보고서 어쩌면 교육청 관계자들이 펄쩍 뛸지도 모르겠다. 이맘때면 연례행사처럼 일선 학교로 하달되는 공문이 이른바 '촌지 수수 근절' 관련 공문이니. 그런데 국어사전을 찾아보면 촌지(寸志)는 '마음이 담긴 작은 선물, 정성을 드러내기 위하여 주는 돈'이라 뜻풀이 되어 있다. 그렇다면 촌지는 근절할 게 아니라 오히려 장려해야 마땅하지 않겠는가? 그런데도, 이런 공문이 내려오고 신문 방송에 촌지 문제 관련 보도가 나오는 걸 보면, 촌지를 빙자한 뇌물을 주고받는 일이 더러 있기는 있는 모양이다.
내가 근무하고 있는 학교가 자리잡고 있는 곳은 담임을 해도 촌지 받을 일이 거의 없다. 그런데도 이러한 사정을 모르는 내 친구들은, 서울 강남지역의 촌지 문제를 보도하는 뉴스만 보고서는, 올해 고3 담임을 맡아서 촌지 많이 받았을 테니 술 한 잔 사라고 조른다.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어이가 없기도 하고, 교직사회를 바라보는 곱지 않은 시선 때문에 부끄러워지기도 한다.
담임을 하다 보면 간혹 얼마간의 촌지가 들어오기도 한다. 하지만 그 돈을 자기 주머니에 넣는 선생님을 나는 아직 본 적이 없다. 대개는 그 돈으로 학생들에게 과자나 아이스크림을 사서 나누어 주거나 피자 파티를 연다. 어떤 선생님은 책을 사서 학생들에게 주기도 하고, 거기에다 자기 돈을 더 보태어 형편이 어려운 학생의 학비를 대신 내 주기도 한다.
20여년 전 경북 영덕의 어느 여학교에서 근무하던 햇병아리 교사 시절의 일이다. 방학을 며칠 앞둔 여름날 밤, 자율학습 지도하느라 교무실에 앉아 있는데, 웬 할머니 한 분이 교무실로 오시더니 아무 말씀 없이 치마 안에서 사이다 한 병을 꺼내 책상 위에 올려놓고 나가시는 게 아닌가. 뜻밖의 일에 무슨 영문인지 모르고 멍하니 앉아 있다가 뒤늦게 정신 차리고 쫓아가 보니, 어디로 가셨는지 보이질 않는다. 교무실로 되돌아와 자세히 보니 사이다병 옆에 꼬깃꼬깃 뭉친 종이가 하나 놓여 있다. 펼쳐보니, 천원짜리 지폐 한 장이다. 이게 뭔가. 한참을 생각하고 나서야 나는 깨달았다. 아하, 이게 촌지라는 것이구나! 그런데, 몇 학년 몇 반의 누구 할머니라는 말씀도 없이 그냥 가버리면 어떡하나. 아마도, 자기 손녀를 위해 밤늦게까지 고생하는 선생님께 고마운 마음을 표현하고는 싶은데, 가진 게 없다 보니, 이런 식으로 그 마음을 표현하셨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 이 돈과 사이다 한 병을 장만하기 위해 그 촌로께서 시골 장터 좌판 위에 채소 몇 가지를 얹어 놓고 몇 시간을 쪼그려 앉아 있었을 걸 생각하니 가슴이 찡해졌다. 그때 내 목과 가슴을 쩌릿쩌릿 울리며 넘어가던 그 사이다의 맛을 나는 지금도 잊지 못한다. 그리고, 이런 촌지를 다시는 받지 못할 것 같아 더욱 아쉽기만 하다.
변준석(시인·영진고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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