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규모 택지개발이 진행돼 아파트촌으로 변한 대구 북구의 한 동네. 수년전 한 시중은행은 이 곳 주민들로부터 거센 항의를 받았다. 엄청나게 많은 아파트가 들어서면서 상주인구가 몰려들었는데 규모가 큰 은행이 지점을 안내는 것이 말이 되느냐는 주장이었다.
이 시중은행의 대구지역본부 책임자들은 이 사실을 본점에 알렸지만 '안된다'는 통보가 왔다. '이익이 나지 않을 것으로 본다'는 설명과 함께. 결국 이 동네 지점은 본부의 건의가 있고 난 뒤 2년 가까이 지나서야 문을 열었다.
"우리도 답답합니다. 모든 결정권을 쥔 본점 사람들은 계산기를 두드려보고 그 결과만 믿죠. 지역본부의 건의는 말 그대로 건의일 뿐입니다". 이 시중은행의 대구본부 관계자는 본점에 모든 힘이 실린 상황이라 지역본부는 목소리를 못낸다고 했다.
쏟아져 들어오는 수도권 본사 금융회사들. 이들 금융회사 역시 지역 경제의 구성원이 됐지만 '지역을 위해 한 것은 뭐 있느냐'는 질문에 속시원한 대답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본점 중심의 결정 체제가 있을 뿐이어서 지역에 대해서는 기여를 하고 싶어도 못한다는 것이다.
◆본점에 물어보세요
대구에 근무하는 시중은행 한 관계자는 "우리도 답답하다"고 했다. 뭔가 해야하는데 '총알'이 없으니 하고 싶어도 못한다는 것.
"연말 불우이웃돕기도 그렇습니다. 대구경북 등 각 지역별로 이웃돕기성금을 모두 배분, 지역본부장이 해당 지역에 내게 하면 지역에서의 인상이 좋게 변하겠지만 실제 사정은 그렇지 못합니다. 건의를 해도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본점은 서울에서 수십억원의 기부를 했다고 신문에 나지만, 이런 기사가 나면 여기서는 욕만 먹게되는 것이죠."
대구사회복지공동모금회에 따르면 지역에서 독자적인 고액 기부활동을 벌이는 수도권 본사 금융회사는 농협 뿐인 것으로 집계됐다. 농협의 지역본부만이 대구와 경북에서 벌어간 돈의 일부를 지역에 환원하고 있는 것이다.
더욱이 시중은행들은 지역 사람들의 금융편의를 위한 '투자'에도 지극히 인색하다. 고객들의 금융 편의를 높여주기 위한 지점 개설조차 본점이 결정권을 쥐고 있으니 지점 개설작업이 좀처럼 속도를 내지 못한다는 것.
실제로 시중은행은 전국적으로 5천700곳에 육박하는 지점을 갖고 있으나 70% 가까이가 수도권에 몰려 있다.
◆흔들리는 지역 자금
외환위기 이전에 대구은행을 주축으로 대동은행·조선생명·동양투신·경일종금·영남종금·대구종금 등 대구에 본사를 둔 금융회사들이 10곳에 육박했으나 외환위기 이후 모두 문을 닫으면서 지역의 돈이 지역 곳간에 머무를 확률은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
금융감독원 대구지원에 따르면 대구경북엔 역외 은행 15곳, 증권사 25곳이 영업을 하고 있다. 또 생명보험사 19곳, 손해보험사 13곳, 카드 및 여신전문회사 13곳 등의 역외 금융회사들이 지점 문을 열어놓고 있다.
특히 지난해 이후 본격적으로 불기 시작한 주식 및 펀드 투자 열풍은 수도권 본사 금융회사들의 돈 주머니를 더욱 두둑하게 만들고 있다.
이달 10일 기준으로 우리나라 사람들이 넣고 있는 국내외 주식형펀드 설정액은 136조8천억원에 이른다. 증권업협회가 최근 내놓은 '2007년 간접투자자 투자실태에 대한 조사보고서'에 따르면 대구사람들의 12.8% 정도가 투자상품에 돈을 넣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대구경북의 전국 인구비중, 투자성향 등을 감안할 때 아무리 적게 잡아도 10조원 이상의 돈이 수도권 본사 금융회사들의 금고로 들어간 뒤 투자상품 가입으로 이어지고 있는 것.
◆지역의 심장을 지켜라
진병용 대구은행 경제연구소장은 "역외 금융회사들은 투자상품 등 다양한 '금융 메뉴'를 갖고 영업을 하고 있으므로 지역민들의 금융 효용을 높여주고 있다는 명분을 내세우고 있지만 수익을 올리는 것만큼 지역에 대한 공헌을 하고 있는지는 의문"이라고 했다.
그는 또 "역외 금융회사들로 인한 지역 자금 역외 유출도 우려되는 것이지만 최근엔 국민연금·건강보험·고용보험·산재보험 등 중앙정부가 주도해서 걷어가는 4대 사회보험의 역외유출도 심각한 문제로 떠오르고 있다"고 지적했다.
노동부가 지난해 하반기 내놓은 상시근로자 10인 이상 기업 3천536곳 대상 노동비용 조사 결과 발표 자료에 따르면 근로자 1인당 월평균 노동비용은 339만3천원. 이 가운데 4대 사회보험비용은 22만9천원으로 집계됐다. 기업이 근로자에게 지불하는 돈 가운데 10%에 육박하는 돈이 사회보험으로 나가고 있는 것. 4대 사회보험 중 국민연금 보험료가 41.4%로 가장 높은 비율을 차지했고 건강보험료 25.4%, 산재보험료 19.7%, 고용보험료 12.0% 등이었다.
지역 경제계에서는 4대 사회보험 징수액 중 일부를 지역에 예치하게 만드는 등 '지역 자금 유출 방지 대책'이 시급히 마련되어야한다는 지적을 내놓고 있다.
일본의 경우 110곳에 이르는 지방은행이 지역 금융시장의 절반 안팎을 장악하면서 지방 경제의 버팀목을 하고 있다.
최경철기자 koala@msnet.co.kr
▨ "금융도 자치를 해야한다" 권상장 계명대 교수
"역외 금융회사들은 본점 중심 의사결정 구조를 갖고 있습니다. 때문에 지역에서 수익을 얻어가더라도 이 곳에 대한 기여가 적다는 불만이 나올 수 밖에 없습니다"
권상장(계명대 교수) 금융경제선물연구원장은 "본점 중심의 의사결정구조를 깨기 위해서는 시스템을 바꿔야한다"고 지적했다.
"우리나라는 지방자치를 한다고 하지만 지방자치단체에 자치권을 주지 않고 있습니다. 금융회사도 마찬가지입니다. 미국은 주(州)정부가 금융기관의 영업허가권을 갖고 있습니다. 때문에 미국에는 7천개가 넘는 지방은행이 지역 금융을 일으키면서 산업의 심장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그는 우리나라도 지방자치단체에 금융기관 영업허가권을 허락해야한다고 했다. 그래야 역외 금융회사를 통한 지역자금 유출 시비가 일어나지 않는다고 했다.
"우리나라처럼 중앙집중적 허가시스템이 강한 나라는 드뭅니다. 당연히 금융회사들은 서울의 본점 중심 의사결정을 합니다. 중앙에 이렇게 많은 권한이 집중돼있는데 어찌 금융회사들이 지방에 무엇을 해줄까 고민하겠습니까?"
그는 지방선거를 통해 단체장만 뽑으면 뭘 하느냐고 되물었다. 금융회사에 대한 영업 허가권을 지방정부가 가져야 '지역 금융'이 만들어질 수 있다는 것.
"자치의 개념을 확대시키지 않고 역외 금융회사들에 대해 뭔가 기대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얘기입니다. 지방정부가 금융자치, 산업자치를 하지 못하는 한 지역 경제는 영원히 들러리 경제에서 빠져나오지 못합니다"
그는 지방이 뭉쳐서 지방의 권한을 찾아오자고 했다. 그래야 지역에 돈이 머물 수 있다고 강조했다.
최경철기자 koala@msnet.co.kr
댓글 많은 뉴스
이재명 90% 득표율에 "완전히 이재명당 전락" 국힘 맹비난
권영세 "이재명 압도적 득표율, 독재국가 선거 떠올라"
이재명 "TK 2차전지·바이오 육성…신공항·울릉공항 조속 추진"
대법원, 이재명 '선거법 위반' 사건 전원합의체 회부…노태악 회피신청
국정원, 中 업체 매일신문 등 국내 언론사 도용 가짜 사이트 포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