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야고부]DNA

1983년 11월 22일 영국 레스터셔주 나보로의 한적한 도로에서 15세 소녀 린다 맨이 성폭행당한 후 목이 졸려 숨졌다. 경찰은 피살자에게서 혈액형이 A형인 남성의 정액을 채취했으나 사건은 미제로 남았다. 3년이 안 된 1986년 8월 2일 또 다른 15세 소녀 돈 애시워드가 숨진 채 발견됐다. 경찰은 동일범의 소행으로 추정했다. 애시워드를 발견, 신고한 17세 소년 리처드 벅랜드가 용의선상에 올랐다. 그러나 범인과 혈액형이 같다는 것 외엔 아무런 증거가 없었다.

이 무렵 레스터대학의 알렉 제프리 교수는 유전학 연구에 몰두했다. 1984년 9월 10일 DNA X레이 결과를 들여다보던 그는 '유레카(발견했다)'를 외쳤다. 家系(가계) DNA를 비교 검토하던 중 개인별 유사점과 차이점을 찾아낸 것이다.

용의자 벅랜드가 첫 테스트 대상이 됐다. 벅랜드의 DNA 지문과 두 소녀에게서 발견된 DNA 지문이 대조됐다. 결과는 '꽝'이었다. 자칫 강간살인범으로 몰릴 뻔했던 벅랜드는 혐의를 벗었다. 경찰은 인근 5천명의 남성을 상대로 혈액 샘플을 얻어 DNA 지문을 조사했다. 하지만 역시 허탕이었다. 사건은 오리무중으로 빠져 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경찰은 한 남성이 그의 친구 '콜린 피치포크'를 대신해 혈액 샘플을 제공한 사실을 떠들고 다닌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피치포크는 경찰에 연행됐다. DNA지문 대조 결과 범행은 들통났다. DNA 지문을 통해 범죄가 입증된 첫 사례가 됐다.

DNA 감식법은 오늘날 법의학에 있어 傳家寶刀(전가보도)다. 미국은 1994년 중범죄자를 가려내기 위한 DNA법을 만들어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하고 있다. 여기엔 현재 590만 명의 범죄자 정보가 들어있다. 최근엔 한 걸음 더 나아가 일단 체포된 자는 외국인을 포함, 모두 DNA를 등록하겠다고 발표했다. 그동안 총 6만7천285건의 조사를 통해 6만6천750건에서 성과를 얻었다고 한다. 현재 범죄자 DNA 데이터베이스를 운용하는 나라는 76개국에 이른다.

우리나라도 2006년 8월 '유전자감식정보의 수집 및 관리에 관한 법률안'이 국회에 상정됐다. 하지만 이 법안은 지금까지 국회 법사위에서 잠자고 있다. 우리가 DNA 데이터베이스를 일찍 갖췄더라면 '혜진'예슬' 같은 피해자나 막가파식 발바리 사건을 막을 수 있었을 지도모른다.

정창룡 논설위원 jcy@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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