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기의 변천을 보면 당시 사회와 문화의 변화를 가늠할 수 있습니다. 요즘 우리나라 대중문화 전반에 걸쳐 진행되는 서구화 바람 때문에 자칫 우리 고유의 멋이 사라질까 걱정이 됩니다."
24일 영남대 박물관에 머리가 희끗희끗한 원로국악인이 찾아왔다. 1971년 영남대에서 '국악개론'이라는 국악 관련 정규강의를 지역 최초로 열고 이후 2001년까지 30년 동안 지역대학 강단에서 국악 보급에 앞장섰던 향토국악인인 박기환(77·왼쪽)옹. 그는 '국악통론'의 저자이면서,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아악기인 '편경'과 '편종'을 해방 이후 처음으로 재현하는 데 성공하는 등 국내외에 널리 알려진 국악 지킴이다.
이날 영남대를 찾은 그의 손에는 그동안 애지중지하게 간직했던 애장품인 가야금이 들려 있었다. 박옹의 갑작스런 학교 방문에 의아해 하던 박물관 직원들은 그의 방문 목적에 화들짝 놀랐다. 그가 80여 년 동안 힘들게 수집하고 소중하게 보관해왔던 가야금을 비롯한 악기 142점을 모두 학교 박물관에 기증하겠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박옹은 "점점 기억 속에서 사라지고 있는 우리 전통 악기 문화를 대중에게 널리 알리고 싶어 그동안 집안 깊숙이 모셔오던 악기에게 햇빛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했다. "그동안 수집했던 악기들 하나하나에 우리의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져 있습니다. 때문에 박물관 소장고 깊숙이 간직하지 말고 박물관을 찾는 관람객들이 쉽게 볼 수 있도록 잘 전시해 주세요."
그가 이날 건넨 악기들은 거문고, 아쟁, 북, 장고, 비파 등 우리에게 익숙한 악기에서부터 생황, 법금, 훈, 소, 지, 어루, 편경 등 다소 생경한 전통악기까지 종류가 다양했다. 또 사치리끼(일본 피리), 샤쿠하찌(퉁소처럼 생긴 일본 전통악기), 중국 나팔, 티베트 악기 등 인근 국가의 전통악기들도 포함됐다.
박옹은 그중에서도 가장 소중하게 간직했던 가야금을 쓰다듬으며 깊은 회상에 잠겼다. "1950년 중반 이 가야금에서 나는 소리에 반해 한 달 동안 주인을 따라다녔어요. 절대 안 팔겠다는 주인에게 탁주 대접은 물론 당시엔 엄청난 거금인 3천 원을 주고 겨우 넘겨받을 수 있었지요."
소중한 자식 같은 악기들을 학교에 내주고 빈손으로 돌아서면서 박옹은 "지역에도 우리 전통악기를 위한 박물관이 하나 지어져 죽기 전에 보는 것이 가장 큰 소원이다"고 말했다.
정욱진기자 penchok@msnet.co.kr
댓글 많은 뉴스
국힘 김상욱 "尹 탄핵 기각되면 죽을 때까지 단식"
[단독] 경주에 근무했던 일부 기관장들 경주신라CC에서 부킹·그린피 '특혜 라운딩'
최재해 감사원장 탄핵소추 전원일치 기각…즉시 업무 복귀
"TK신공항, 전북 전주에 밀렸다"…국토위 파행, 여야 대치에 '영호남' 소환
헌재, 감사원장·검사 탄핵 '전원일치' 기각…尹 사건 가늠자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