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교시를 부활하고 보충수업 제한도 없애고, 사설 모의고사도 칠 수 있도록 한다. 전국학력평가를 실시해서 학교별 서열도 매긴다고 한다. 절대평가가 아닌 이상 아무리 수백만원짜리 과외를 붙이고 새벽 3, 4시까지 학원에 붙잡아 두어도 결국 1등과 꼴찌는 나눠지기 마련이다. 전체 학생들의 학력이 신장되고 국가경쟁력이 강화된다고? 경제협력기구(OECD)가 발표한 '2006년 학업성취도 국제학력평가'(PISA)에서 세계 최고 학력 수준을 보인 나라는 한국이 아니라 핀란드였다. 핀란드 학생들은 오후 3시면 하교하고 0교시 수업이나 야간자율학습은 없다. 규모의 경제를 앞세운 대형소매점들이 잇따라 들어서면서 동네 구멍가게들은 초토화됐다. 대형 건설사들이 대구경북 시장 공략에 나서면서 지난해 전체 건설 수주액의 3분의 2를 가져갔다. 한 경제학자는 이렇게 말했다. "제국주의 시절 서구 열강들은 탐욕스런 시선으로 식민지를 바라보며 자국의 깃발을 꽂지 못해 안달이었다. 현 정부가 바라보는 시선이 이런 것 같다. 미개하고 뒤처진 사회 각 분야에 '경쟁'이라는 종교를 퍼뜨리지 못해 안달이 났다." 지금 세상은 정글로 변하고 있다.
◆현대 사회에서 '경쟁'은 신성불가침의 종교다
세상 사람들은 경쟁만큼 공정한 것이 없고 경쟁을 통해 벌어지는 격차에 대해 마치 '신성불가침'인 듯 숭배하고 있다. 고교생 박준규(17)군은 "학교 일진들조차 전교 석차가 10위권 정도인 친구들은 안 건드린다. 마치 아이들 머리 위에 '만만한 아이', '버거운 아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다니는 것 같다"고 말했다. 중학생 정은실(13)양은 "예쁘거나 공부 잘해서 좋은 대학 가거나 부자 부모를 만나는 게 경쟁력 아니냐? 억울해도 타고난 경쟁력 차이는 인정해야 한다"고 했다. 태어나면서부터 경쟁 속에 산다. 초등학교에 들어가 첫 시험을 치고 돌아오면 "몇 개나 틀렸니?"라고 묻는다. 바로 이어지는 질문은 99% 뻔하다. "친구들도 잘 쳤어?" 대구 수성구 모 고교에서 전교 20위권인 고교 2년 정모군은 "우리반 1등은 야간자습이 끝나면 바로 학원에 가서 새벽 2, 3시까지 공부하고 3시간도 채 안 자고 학교에 온다"며 "수면 억제제까지 먹고 있지만 도저히 이길 자신이 없다"고 말했다. 모두가 미친 듯이 공부만 해서는 사회가 유지될 수 없다. 개인이 행복해지는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이처럼 죽음을 부르는 경쟁에 몰두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10여년 역 광장에서 1인 시위를 벌이던 청년이 있었다. 유명 전자업체 용역경비업체 직원이던 이 청년은 기차를 타고 출퇴근했다. 어느 날 야간근무를 앞두고 친구들과 저녁을 먹으며 막걸리 한 잔을 마신 이 청년은 기차에서 깜빡 잠이 들어 내려야 할 곳을 통과해버렸다. 차비도 없던 이 청년은 돌아가는 기차편 때문에 역무원과 실랑이가 벌어졌고 급기야 경찰서까지 붙들려갔다. 사건 내용을 들은 경찰관은 직업을 물었다. '○○전자'라는 이름을 들은 경찰관은 "젊은 사람이 왜 그렇게 다투고 그래?"하며 훈방할 뜻을 비쳤다. 하지만 정식 직원이 아니라 경비용역업체 직원임을 뒤늦게 알고 조서 뭉치로 그 청년의 머리를 때린 뒤 "너 같은 녀석은 고생 좀 해봐야 해"라며 공무집행방해로 구속영장을 신청했고, 결국 이 청년은 전과자가 되고 말았다. 당시 그 청년은 울먹이며 이렇게 말했다. "내가 공부를 잘해서 ○○전자 직원이었더라면 과연 내 인생에 실랑이 한번 때문에 빨간 줄이 그어졌을까?"
비록 학창시절 공부를 잘하지도 않았고 ○○전자 직원도 아니었지만 이 청년은 친구들과 막걸리 잔을 기울이며 행복했고, 부모님에게는 더없이 귀한 아들이었다. 하지만 그는 전과자가 되고 말았다. 직장인 최정호(47)씨는 "현대인들에게 종교는 바로 '경쟁'인 것 같다"며 "살아가는 동안은 물론이고 화장터에 먼저 가겠다고 새벽 일찍 발인 경쟁을 벌이는 것을 보면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주부 장윤주(32)씨는 "보이지 않는 총칼이 난무하는 세상에서 학벌과 재산은 더없이 좋은 갑옷"이라며 "아이를 키우며 하루에도 몇 번씩 '이건 아닌데'라고 스스로 물어보지만 결국 정글 같은 세상이 겁 나서 남을 따라하게 된다"고 했다.
◆120억명이 먹고살 식량이 생산되는데 8억명이 굶고 있다
조금 다른 이야기를 해 보자. 요즘 한창 걱정거리 중에 하나인 식량대란. 아시아의 주식인 쌀 가격이 폭등세를 보여 25억 아시아인의 밥상이 위협받고 있다. 쌀값은 지난 1월보다 2배 뛰었고, 전세계 쌀 재고량은 지난 1976년 이후 최저 수준이다.
다른 곡물도 마찬가지. 지난달 14일 인도네시아 수도 자카르타 대통령궁 앞에서는 시민, 노동자 1만여명이 시위를 했다. 전년도 125% 급등한 콩값이 다시 50% 올라 식품회사들이 아예 공장 문을 닫아버리자 시민들이 거리로 뛰쳐나온 것. 카리브해의 가난한 나라인 아이티에서는 지난 8일 굶주린 빈민들이 대통령궁으로 몰려가 대통령 사임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였다. 식량 폭동으로 지금까지 최소 5명이 사망했다. 아이티 사람들이 '진흙 쿠키'를 만들어 먹는 모습은 세계에 충격을 주었다. 진흙 쿠키를 먹는 사람들은 심한 복통을 호소하면서도, 허기를 달래기 위해 먹을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지난 2월 카메룬에서 폭동으로 40명이 사망한 데 이어 이집트에서도 식료품 폭동으로 4명이 숨졌다.
'중국농민조사'를 쓴 천구이리와 우춘타오 부부는 2004년 세계적인 르포작가에게 주는 율리시스 르포문학상을 받았다. 이들은 안후이성 농촌 마을 300여 곳에서 비참한 농민 현실을 기록했다. 국유화된 토지를 부패한 지방정부가 강제 수용하는 과정에서 많은 농민들이 자살했다. 자살하는 데 농약을 살 돈이 없어 외상으로 사서 마시고 죽은 이도 있었다.
식량 위기의 이유는 여러 가지다. 그중 하나는 경제성장으로 소득이 높아진 중국과 인도가 곡물 자원을 빨아들이고 있는 것. 중국인들은 1985년 1인당 20kg씩 먹던 고기를 2006년 50kg씩 먹는다. 쇠고기 1kg에는 곡물 8kg이 들어간다. 그러다 보니 자기들 먹을 것도 없다면서 수출까지 제한하고 있다.
곡물자원을 이용한 바이오산업도 문제다. 미국은 지난해 옥수수 생산의 3분의 1을 바이오 연료로 사용했다. 먹고살 식량이 없어서 거리로 뛰쳐나오는 나라가 있는가 하면 옥수수를 자동차 연료로 만드는 나라도 있다.
전세계 인구 증가율은 1990년 1.3%로 내려간 반면 농업생산량은 1960년 이후 매년 2%씩 증가했다. 세계 인구는 66억7천만명인데 지구에서 생산되는 식량은 120억명이 먹고 남을 만한 식량이 생산된다. 그런데 매년 8억명 이상이 굶어 죽기 직전이다. 반기문 UN사무총장은 세계적인 식량 부족문제가 '비상사태' 수준에 도달했다고 경고했다.
반면 식량대란의 와중에 막대한 이익을 챙기는 이들도 있다. 미국의 세계적 곡물거래회사인 카길은 이번 식량 위기 속에 괄목할 만한 수익을 올렸다. 이 회사는 지난 2월 말로 종료된 이번 회계연도 3/4분기에 10억3천만달러 수익을 냈다.
백과사전에서 찾아본 '경쟁'에 대한 설명의 뒷부분에 이런 말이 나온다. 한정된 자원을 서로 가지려고 지나치게 다투면 서로 공멸할 것이 뻔하기 때문에 생물들은 '나누어살기'를 택한다고. 하지만 우리는 어떤가?
김수용기자 ksy@msnet.co.kr
♠ 경쟁이 불러온 우리 시대의 슬픈 자화상
# 1
통계청이 분석한 2005년 인구통계기준에 따르면 우리나라는 10만명당 26.1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연평균 자살률 1위를 기록했다. 5분에 한 명씩 자살 시도가 이뤄지고, 45분에 한 명꼴로 자살한다. 청소년 20명 중 1명이 자살을 시도한다. 질병관리본부가 2005년부터 중고생 8만명을 대상으로 해마다 벌인 조사 결과다.
# 2
서울대 학생처는 우울증으로 인한 충동 자살 등을 막기 위해 정신과 의사, 경찰 등으로 구성된 '5분 대기조' 성격의 긴급구조반을 운영하겠다고 밝혔다. (중략) 서울대는 2007년 유난히 학생 자살 사건이 많았다. 졸업을 앞둔 인문대 4학년 여학생이 기숙사에서 목을 매 숨졌다. 신림동 고시원에서 인문대 남학생이 목숨을 끊었다. 최근 2년간 서울대생 10명이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 (중략) 서울대 보건진료소에서 직접 정신과 치료를 받은 학생수도 2004년 159명, 2006년 680명으로 급격히 증가했다.
# 3
지난 16일 방송된 KBS TV '추적 60분'은 엘리트 여강사 한경선씨의 자살을 보도했다. 한씨는 지난 3월 미국 텍사스 한 모텔에서 숨진 채로 발견됐다. 지방 사립대 강의교수였던 한씨는 유서에서 "교수가 되려고 미국 명문대학에서 공부했는데 지난 4년간 한국 생활은 제 정신을 가지고는 살아갈 수 없었다. 더 이상 나와 같은 비극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란다"라고 썼다.
# 4
"인간은 항상 자유를 추구하는구나. 나도 자유로운 사람이 되어야지. 공부 힘들어서 자살하는 사람들. 다 남 이야기 같았어. 하지만 아니야. 공부 공부 공부 공부. 같은 곳에서 각기 다른 재능을 지닌 아이들이 오직 한 가지만 배우고 있었어. '대학가는 법'. 슬펐어. 난 사실 평범한 여중생일 뿐이야. 노래 부르길 좋아하고, 그림 그리길 좋아하고, 수다떨기를 좋아하고, 친구들과 어울려 놀기를 좋아하는. 하지만 사회는 내게 그걸 바라지않아." - 대구에서 목숨을 끊은 한 여중생이 숨지기 전날 남긴 유서.
김수용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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