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성(詩聖)으로 일컬어지는 두보(杜甫)의 시 '춘망(春望)'. 그가 46세 때 당나라 봉선현에 있는 처자를 만나러 갔다가 안녹산의 군사에게 사로잡혀 장안(長安)에 연금된 상황에서 지은 작품이다. 오언율시인 이 시에는 인구에 자주 회자되는 유명한 구절이 나온다. "나라는 망했어도 산하는 그대로요(國破山河在), 성에는 봄이 와 초목이 무성하네(城春草木深)." 나라가 망해도 아랑곳하지 않고 피어나는 풀과 나무를 보면서 느끼는 세사(世事)의 무상함을 노래하고 있다.
두보는 나라가 망했어도 산하는 그대로라고 읊었지만 일제에 나라를 송두리째 잃은 우리 조상들은 그 슬픔을 더욱 극적으로 표현했다. 산천초목도 나라 잃은 슬픔에 울었다고 했다. 굳이 두보의 시에 비유한다면 "나라가 망하니 산하도 울었다(國亡山河泣)"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나라 잃은 슬픔에 사흘을 운 측백나무!
성주군 벽진면 수촌리에 있는 해평동 측백나무. 높이가 약 25m에 이르는 우람한 위용을 자랑하는 나무다. 땅에서 2.6m 정도 되는 높이에서 가지가 다섯 개로 갈라져 있다. 잎조차 달리지 않은 가지가 3, 4개에 이르지만 굳건한 기상은 여전하다.
수령이 340년을 넘는 이 측백나무는 일본에 국권을 강탈당한 경술년(1910)에 사흘 동안 울었다는 전설이 있다. 나무의 모양이 기이하고, 수령이 수백년에 이르는 명목(名木)에 나라 잃은 슬픔을 투영하고 싶은 민초들의 안타까운 심정이 배어 있다는 생각도 든다.
이 나무가 심겨진 것은 조선 현종 9년(1668). 여효증(呂孝曾)이 충청도 임천군수로 봉직하고 낙향할 때 그곳 주민들이 선물로 준 것을 가져와 이곳 만연당(漫然堂) 뜰에 심은 것이라고 한다. 측백나무과에 속하는 측백나무는 상록침엽수로 관목 또는 교목으로 우리나라와 중국에 분포하고 있다. 우리에게는 대구 동구 도동에 있는 천연기념물 1호 달성측백수림으로 친근한 나무다. 이 나무의 잎은 부인병에 특효가 있다고 하며 나뭇잎의 발육상태와 색을 보고 그해 농사의 풍흉을 점쳤다고 한다. 경술국치를 당하고 사흘 동안 울었다는 전설이 생길 정도로 일찍부터 영험한 존재로 여겨진 나무인 것이다.
나라를 향한 충절 서린 해동청풍비
측백나무를 보고 벽진면 봉계리에 있는 해동청풍비(海東淸風碑)를 찾았다. 평평한 바닥돌 위에 비신을 세운 간단한 형태다. 눈에 띄는 것은 웅장한 비석의 크기. 높이 3.2m에 너비 1.1m, 두께는 45cm에 이른다. 이 비는 1936년 전국 유림들이 자하(紫下) 장기석(張基奭·1860~1911)의 충절을 기리고, 백성들에게 항일의식을 불어넣기 위해 공을 들여 세웠다. 일찍 부모를 여읜 자하는 가난으로 공부를 하지 못하다가 39세 무렵 학문에 뜻을 두고 수학해 43세 때 유학 경서를 두루 섭렵한 다음 후진교육에 전념했다. 1910년 경술국치 때 비분강개해 항일의식을 고취하다 같은 해 12월 성주경찰서에 감금됐다 대구형무소로 이감되어 1911년 1월 순국했다. 일제가 넣어주는 음식을 거부한 채 잔혹한 위협과 집요한 회유에도 동요하지 않고 끝까지 절의를 지켰다.
해동청풍비가 세워진 이듬 해인 1937년 왜경이 비를 파괴하려 하자 자하의 부인 박씨는 자결로 항거했다. 해동청풍비 옆에는 부인 박씨를 기리는 기열비(紀烈碑)가 따로 세워져 있다. 그러나 일제는 끝내 해동청풍비를 파괴해 버렸고, 광복 후 조각들을 찾아 모아 다시 비를 세웠다. 비각 뒤편에 있는 대나무들은 그때의 일을 기억이라도 하는 듯 늘 푸르름을 간직하고 있다.
의열각, 젊은 부부의 충혼을 기리다
벽진면 봉계리에서 차로 20여분 거리에 있는 대가면 면소재지. 성주로 나가는 33번 국도변(칠봉리)에 의열각(義烈閣)이 있다. 이 건물은 일제에 저항하다 자결로 순국한 이경환(李慶煥·1902~1929)과 그를 따라 자결한 부인 배씨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건립한 것이다. 1928년 일본으로 건너간 이경환은 일왕 히로히토(裕仁)가 교토를 방문했을 때 조선 침략의 부당성과 조선총독부 철폐를 요구하는 직소장(直訴狀)을 제출하려다 영어(囹圄)의 몸이 되었다. 옥고를 치르며 갖은 고통을 겪은 뒤 귀국, 1929년 11월 빼앗긴 나라에서 더 이상 살 수 없음을 탄식하며 목을 매 자결했다. 부인 배씨도 남편이 죽은 지 3일 만에 뒤따라 자결했다고 한다. 이경환에게는 1968년 대통령표창,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이 각각 추서됐다.
글·이대현기자 sky@msnet.co.kr 박용우기자 ywpark@msnet.co.kr 사진·박노익기자 noik@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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