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에서 온 초능력자의 쇼가 텔레비전에서 진행되고 있었다. 유리 겔러. 그는 손을 대지 않고 시곗바늘의 초침을 멈추게 하고 동전을 끌었다. 그리고 '방청객들과 시청자들도 따라 해 보라'며 숟가락을 구부렸다. 물론 염력으로.
고등학생인 그(유리 겔러가 아니라 소설 속 주인공)는 텔레비전을 켜놓고 밥을 먹던 중이었다. 그는 숟가락을 노려보며 속으로 외쳤다.
'숟가락아, 구부러져라.'
그 순간 놀랍게도 숟가락이 기역자로 구부러졌다. 다음 날 학교에서는 유리 겔러가 단연 화제였다. 그때 그는 '나도 구부렸는데…'라고 말했다. 조용하고 과묵한 성격, 친한 친구도 없는, 그래서 존재감이 희미했던 그의 곁으로 아이들이 몰려왔다.
'뭐? 숟가락을 구부렸다고? 어디 구부려 봐.'
그는 도시락 까먹던 숟가락을 쥐고 정신을 집중했다. 숟가락은 구부러지지 않았다. 그래서 '친구들의 귀중한 시간을 빼앗고 면학분위기를 해쳤다'는 이유로 얻어맞았다.
그 뒤로도 그런 일은 이어졌다. 그는 특별한 장기가 없었기 때문에 좀처럼 나서지 않았다. 그러나 나서야 하는 경우가 있었다. 군대시절 장기자랑, 신입사원시절 회식자리…. 그럴 때마다 그는 숟가락을 구부리기에 도전했다가 실패하고 두들겨 맞거나 욕을 먹었다. 사람들이 안 보는 자리에서는 가끔씩 구부러지는 숟가락이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는 구부러지지 않았다.
결혼한 후에도 마찬가지였다. 어느 날 문득 숟가락을 구부렸던 그는 아내에게 "여보 봤어?"라고 물었다가 욕만 먹었다. 별 능력이 없는 그는 승진이 늦었고, 아내와 딸의 눈에 차지 않았다. 그 모든 것이 숟가락을 구부리는 '기적'을 보여줄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결국 회사를 그만두었고, 집을 나와 거리의 노숙자가 됐다. 노숙자들 사이에서 '숟가락을 구부리겠다'며 나섰다가 실패하고 두들겨 맞았다.
'숟가락을 구부릴 수 있었다면….'
그럴 수 있었다면 그는 고등학교 시절 옥상으로 끌려가 두들겨 맞지 않았을 것이다. 군대에서도 맞지 않았을 것이고, 신입사원 시절 얇은 종이로 나무 젓가락을 잘라버린 입사 동기보다 눈에 띄었을 것이고, 승진이 늦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랬더라면 회사를 그만두는 일도, 집을 나와 노숙자로 전락하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숟가락을 구부릴 수만 있었다면 다른 노숙자들에게 '사기꾼 새끼'라며 두들겨 맞지 않았을 것이다.
어느 날 기적이 일어났다. 노숙자 보호시설 식당에서 그는 마침내 기적을 일으키는 데 성공했다.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숟가락을 구부렸다. 흥분한 노숙자들이 그를 둘러쌌다. 지나온 고난의 세월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그는 주르르 눈물을 흘렀다. 이제 고난의 세월은 끝났다. 기적을 행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모든 불명예와 고난은 사라질 것이다. 그때 노숙자 보호시설 자원봉사자가 다가왔다.
"거기 무슨 일이죠?"
주변의 노숙자들이 대답했다. "이 친구가 숟가락을 구부렸어요. 염력으로 숟가락을 구부렸다고요!"
"그래서 뭐 어쨌다고? 숟가락을 구부리면 밥이 나와 쌀이 나와? 여기 숟가락 구부릴 줄 아는 사람 많아요."
자원봉사자는 한쪽 귀퉁이 테이블에 앉아 있던 대머리 김씨를 지목하며 "어이 김씨, 숟가락 좀 구부려 봐" 라고 소리쳤다. 대머리 김씨는 "왜 하필 나야" 하며 아무렇지 않게, 힘들이지 않고 숟가락을 구부렸다. 자원봉사자는 말했다.
"쓸데없는 짓들 하지 말고 빨리 나가서 취직할 궁리들이나 해요."
우리가 흔히 기적이라고 믿는 것들은 기적이 아니다. 숟가락이 아니라 1t짜리 H빔을 염력으로 꺾는다고 해도 별 쓸모가 없다.
대구 청구고등학교 앞길은 경사가 꽤 심하다. 리어카에 짐을 잔뜩 싣고 그 언덕을 매일 오르내린 남자가 있었다. 리어카에는 언제나 무거운 짐이 실려 있었고 그는 자기 힘만으로 그 언덕을 오를 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단 한번도 언덕을 오르는 데 실패한 적이 없다. 그가 무거운 리어카를 끌고 낑낑댈 때 행인들이 밀어주었고, 그는 수년 동안 그 언덕을 오르내렸다. 리어카꾼은 그 짐삯으로 어린 자식을 먹이고 입혔다. 그 아이들은 자라서 어른이 됐고 취직을 했고 결혼하고 자식을 낳았다.
기적은 그런 것이다. 당신이 잠깐 빌려준 손길이 무거운 짐을 언덕 위로 끌어올리는 것, 그 덕분에 짐꾼의 자식이 굶주리지 않고 반듯한 어른으로 자라는 것, 풀 죽은 아이에게 던지는 칭찬 한마디, 어머니 심부름으로 받은 동전을 잃어버리고 세상을 다 잃은 듯 우는 아이에게 건네는 잔돈 몇 푼…. 그런 친절이 아이의 울음을 멈추게 하고, 절망에 빠진 사람에게 희망을 준다. 그것이 기적이다.
조두진기자 earful@msnet.co.kr
댓글 많은 뉴스
[단독] 경주에 근무했던 일부 기관장들 경주신라CC에서 부킹·그린피 '특혜 라운딩'
최재해 감사원장 탄핵소추 전원일치 기각…즉시 업무 복귀
"TK신공항, 전북 전주에 밀렸다"…국토위 파행, 여야 대치에 '영호남' 소환
헌재, 감사원장·검사 탄핵 '전원일치' 기각…尹 사건 가늠자 될까
계명대에서도 울려펴진 '탄핵 반대' 목소리…"국가 존립 위기 맞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