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쌍추안(一雙秋雁). 가을하늘 아래 짝지어 나르는 기러기 떼를 일컬음이다. 마치 단란한 가족이 행복한 한 때를 보내는 모습 또한 이 기러기떼와 다르지 않다. 하지만 기러기는 암수 중 어느 쪽을 잃으면 남은 한 놈이 일생동안 짝을 그리워하며 혼자 지낸다고 한다.
이에 빗대 늘 함께 있어야 할 가족이 떨어져 서로를 그리워하는 모습이 기러기를 닮았다고 그렇게 불려지는 '기러기 아빠'들. 한국 공교육의 맹점에 대한 갈등과 자녀의 미래에 대한 희망을 기대하며 기꺼이 혼자 남기를 선택한 이들이 2007년 기준 약 20여만명에 이를 것으로 추산된다.
5월 '가정의 달'을 맞아 지난달 24일 오후 7시 대구시내 한 카페에서 현재 기러기 아빠이거나 어린 자녀를 외국에 내보낸 아빠 등 5명을 만나 유학을 보내게 된 사연, 헤어진 가족에 대한 애틋한 그리움, 향후 자녀에게 거는 기대 등을 물어봤다.
◇참석자
▷은문수(50)씨. 학원운영. 2004년 아들 정민(당시 중2)군과 딸 수현(당시 초등6년)양을 엄마와 함께 싱가포르에 보냄. 기러기 아빠 4년차.
▷이석용(47)씨. 증권사 지점장. 올 초 딸 수련(중3)양과 아들 동하(초등6년)군을 엄마와 함께 캐나다 킹스턴(토론토 근처)에 보냄. 기러기 아빠 3개월차.
▷김동철(44)씨. UiU 대표. 2003년 초등학교 5학년'4학년이던 두 아들을 엄마와 함께 2년간 미국 스프링필드에 보냄. 현재는 큰아들 혼자서 말레이시아에 유학중.
▷박경환(49)씨. 자영업. 3년 전에 큰 아들(중3)을 중국 상하이 국제학교에 유학 보냄. 엄마가 수시로 중국을 오고 감.
▷최효상(가명'45)씨. 자동차 영업팀장. 2006년 아들과 딸을 엄마와 함께 인도 남부 IT도시인 뱅갈로르에 보냄. 기러기 아빠 2년차.(개인 사정상 실명과 사진 찍기를 사양함)
-외로움이나 여러가지 생활의 불편함을 감수하면서까지 자녀를 외국에 보낸 이유가 있을텐데요.
은=애들이 먼저 가고 싶어 했어요. 특히 딸애는 수학과 언어능력이 좋아 특수목적고를 지망하고 있었는데 키가 작고 운동에 약합니다. 그런데 이 점이 또래 학생들에게 놀림감이 되다시피 해서'이래선 안 되겠구나'하는 생각이 들어 한 1년 정도 고민하다가 외국에 보내기로 결정했습니다.
이=저도 1년 정도 갈등을 안 한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어느 날 밤 12시에 귀가를 했는데 딸과 아들이 아직 학원에서 돌아오지 않은 거예요. 주말엔 애들과 나들이 한 번 가기도 힘들 정도로 공부에만 매달리자 이렇게 키워선 안 되겠다는 마음이 들데요. 심지어 절망감 마저 밀려올 때도 있고. 이러려면 차라리 공부만 잘하는 아이보다는 리더십과 인성을 원만하게 교육시킬 외국이 국내보다 낫다 싶었죠.
김=제 경우는 교편을 잡은 아내가 학생에게 체벌을 한 적이 있는데 이 때 학부모의 항의가 거셌어요. 이에 아내는 차라리 공부를 더해 대학 강단에 서고 싶다고 해서 유학길에 올랐는데 이 때 어학공부를 겸해 두 아들도 함께 가게 됐습니다. 그런데 이젠 애들이 더 바깥에서 공부하고 싶어 합니다. 학생들의 취미활동을 최대한 보장하는 교육시스템이 애들 마음을 사로잡은 거죠.
박=달서구에서 수성구로 이사를 했더니 지역별 학력격차로 인해 어느 날 애가 우는 거예요. 이 나라 교육제도가 결국은 상위 5% 학생을 위해 나머지 95% 학생들은 들러리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가정의 달을 맞아 특히 아내와 자녀들에 대한 그리움이 더 클 것 같습니다만. 주로 어떻게 달래는지요.
은=또래 아이들이 방과 후 귀가하는 모습을 보면 부정(父情)이 솟구치죠. 모임이나 식당에 가도 단란한 가족모습에 아이들이 그립습니다. 하지만 전화통화는 아이들과는 간단하게 하고, 주로 아내와 많은 대화를 나눕니다. 지나친 관심이 아이들에게 공부하는 힘을 약화시킬까 봐 그런 거죠.
이=아직은 시도 때도 없이 보고 싶습니다. 적응이 안된 상태죠.
김=평일은 근무 때문에 잘 모르지만 주말 혼자 있을 때면 많이 보고 싶죠. 여기 있을 때 아이들과 요리도 함께 했는데. 그래서 친구들 계모임 등엔 잘 나가지 않았습니다. 한창 먹을 나이에 회식 때마다 아이들 생각이 나서죠.
박
=외국에서 공부하는 큰 놈이 부모와 떨어져서인지 철이 빨리 드는 것 같아요. 제 동생 걱정이나 가게가 잘 되고 있는지 먼저 안부를 물어오는 편입니다. 늘 애잔한 마음이 들죠.
최=가족카페를 만들어 놓고 매일 1시간씩 아이들과 화상채팅을 즐깁니다. 사소한 일상사도 빠짐없이 이야기하다보면 가족들이 먼 이국땅에 있는 느낌이 들지 않죠. 또 제가 외국을 많이 나가는 편이라 자주 인도에 가기도 합니다.
-아이들에 대한 그리움이 큰 만큼 앞으로 자녀들에 대한 기대도 큰 것 같은데.
은=섣부른 미래는 잠시 보류해 놓은 편입니다. 일단 적응을 잘 하고 있으니 안심이죠. 딸애가 지난해 싱가포르 수학올림피아드에 나가 대상을 받았고 외국인으로서 총학생회장도 하고 있어 보람이죠. 하지만 한국인의 정체성을 갖기 위해 대학교육은 국내에서 받도록 할 예정입니다.
이=구체적인 목표를 결정한 것이 아니고 아이들이 자립적인 삶을 개척할 수 있는 기회를 갖길 원합니다. 국내에 있다면 정말 하고 싶은 일을 할 기회가 줄어들 것 아니에요.
김=처음 고교를 배정받고 나서 아들이 학교를 가지 않겠다고 하길래 까닭을 물어보니 자기는 인류학을 공부하고 싶은 데 우리나라 고교에서는 그게 불가능하다는 거예요. 그러더니 스스로 국사검정시험도 치고 이 분야 전문서적을 탐독하는 걸 보고 그럼 네가 하고 싶은 공부를 해보라는 의미에서 유학 보냈습니다. 지금 말레이시아에서 공부하고 있는데 영국 식민령이었던 관계로 이곳에서 공부하면 인류학이 강한 유럽, 특히 영국으로의 진출도 훨씬 쉽다는 군요.
최=바깥에서 보다 많은 견문을 보고 배웠으면 합니다. 국내에 있다보면 우물 안 개구리가 되기 십상이죠.
-최근 우리 사회에선 외로움을 이기지 못한 일부 기러기 아빠들의 자살이나 일탈과 같은 부정적인 모습들이 비춰지고 있는데 이에 대한 생각은.
은=두개로 분리된 가족에게 나쁜 상황이 발생하는 건 대화부재가 제일 큰 원인입니다. 국내와 국외에 떨어져 살면서 어려운 점이 왜 없겠습니까. 하지만 국내와 국외의 어려움을 서로 숨길 필요는 없죠. 외국 유학에 올인(All-In)하겠다는 건 어리석은 짓입니다. 가족 해체의 위기가 있으면 지체 없이 다시 합치면 되는 거죠. 우스갯소리로 자녀를 따라간 엄마들이 머리에 선글라스를 올리고 다니면 끝장이란 말이 있죠.(모두들 웃음)
이=드라마나 매스컴에 기러기 아빠들의 일탈이 보도될 때마다 안타깝죠. 기러기 아빠들이나 일반 아빠들의 일탈비율이라는 게 따지고 보면 그리 문제될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괜히 매스컴에서 이를 집중 부각시키는 게 더 문제가 있죠.
-가족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게 무엇일까요.
은=한 집에서 살면 나쁜 면이 더 잘 보입니다. 하지만 떨어져 보면 낯선 곳, 낯선 언어환경에서 얼마나 고생할까 생각하면 도닥거려 줄 여유가 생기죠.
이=평소 대화가 적었고 아이들에게도 칭찬보다는 꾸중이 많았으나 지금은 대화의 기본자세부터 살가운 정이 솟아납니다. 저 스스로도 그렇게 되도록 노력도 하고요.
김=의도적인 애정과 관심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제 아내는 외식할 경우"아빠가 고생해서 보낸 준 돈으로 우리가 이렇게 맛있는 식사를 한다"는 말을 애들에게 함으로써 일탈이나 비행을 예방하고 학습에 열중하도록 한답니다. 서로가 서로를 챙겨주는 일, 이게 진정한 가족의 힘이지 싶습니다.
우문기기자 pody2@msnet.co.kr
사진 정재호기자 newj@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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