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칼로써 지켜내야 하고 칼로써 막아내야 할 세상의 의미를 돌이켜 볼 수 없었고, 그 하찮음들은 끝끝내 베어지지 않는다는 운명을 알지 못했다.(김훈, 부분)
한산도에 도착했다. 하늘은 맑았다. 제승당으로 향하지 않고 반대 방향으로 차를 몰았다. 제승당은 천천히 만나고 싶었다. 한산도는 온통 통제사와 관련된 지명으로 가득하다. 한산도대첩에서 패한 왜적의 머리가 무려 억 개나 되었다는 두억개(頭億浦), 해상에 진을 쳤다는 진작지, 전쟁에 패해 달아나던 왜적들이 물길을 틔우기 위해 개미떼처럼 달라붙어 파놓은 산의 형상이 잘록한 개미허리 모양이 되었다고 해서 생긴 개미목, 해전에서 패한 왜적들이 빨래하던 아낙에게 도망칠 길을 물었다는 문어포(問語浦), 우리 수군이 망을 보다가 적선이 나타나면 깃발을 흔들어 신호했다는 깃대먼당, 척후병을 배치하여 적의 동정을 엿보았다는 얏비기산, 수많은 왜적의 시체를 거두어 매장했다는 매왜치, 해안에 불을 피워 많은 군사들이 주둔해 있는 것처럼 왜적을 속였다는 불막개, 장수를 뽑는 무과시험을 치렀던 새장목. 한산도 거의 대부분의 지명에는 통제사의 흔적이 남아 있다. 생각했던 것보다 섬이 제법 넓었다. 제승당에서 가장 먼 곳, 한산면 소재지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밤새도록 통제사가 부르는 칼의 노래를 들었다. 바람 소리, 파도 소리, 수많은 군사들의 함성 소리, 그리고 민초들의 신음 소리로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렇게 짧은 여름밤이 오히려 길었다. 칼로써 지켜내고 막아내야 할 절박한 세상에서 오히려 하찮음이 끝끝내 베어지지 않음이 쓸쓸했다. 아니, 그 하찮음을 베어낼 수 있는 칼이 통제사에게도, 나에게도 없었다. 그 하찮음이 단순히 죽음이라면 죽음을 베어낼 칼이 통제사에게도, 나에게도 없었다.
죽이되, 죽음을 벨 수 있는 칼이 나에게는 없었다. 나의 연안은 이승의 바다였다.(김훈, 부분)
그래도 아침은 왔다. 일출이 장엄했다. 몇 번의 긴 심호흡으로 일출을 맞이했다. 안개로 가득한 섬들이 점점이 보이는 포구에 고깃배가 들어오고 있었다. 아침을 챙겨먹고 야소, 의암, 죽전, 하포, 진작지를 거쳐 두억개를 찾았다. 통제사는 여수가 전라도 한쪽으로 치우쳐 있어 작전의 어려움이 있다고 생각하고 여기 두억개 일대에 터를 닦아 창고와 작업장, 숙소, 망루 등 진영의 주요 시설들을 마련하고 곧 닥쳐올 또 다른 전투에 대비한다. 당시 장군이 이끌던 수군 병력과 그를 따라나선 피란민의 숫자까지 합치면 한산도 진영의 규모는 상당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이에 대한 기록이 남아있지 않아 진영의 규모와 구조는 확실히 알 수 없다. 두억개는 남해의 여느 포구와 다름이 없었다. 그것이 다시 쓸쓸했다. 통제사는 이미 어디에도 없었다. 쓸쓸한 마음으로 두억개를 지나 문어포로 향했다. 작은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마을 오른편으로 난 산길을 올랐다. 산 정상에는 지난 1976년의 대대적인 성역화 작업 때 세워진 웅장한 규모의 '한산대첩비'가 자리 잡고 있다. 오르는 오솔길은 동백나무가 터널처럼 이어져 있었고 사람이 왕래하지 않아 바닥에는 파란 이끼가 가득했다. 파란 이끼 가득한 길. 특이한 체험이었다. 이름 모를 산새 울음소리와 동백숲, 파란 이끼로 덮인 길. 방치된 길이 오히려 고즈넉했다. 그리고 쓸쓸했다. 그 쓸쓸함은 절박한 시대를 외롭게 살았던 통제사의 그것이기도 했으리라.
쓸쓸함은 대첩비가 있는 정상에 도착해서 더욱 짙어졌다. 돌보는 이가 없어 이렇게 산속에 버려지다시피 한 위대한 승리의 대첩비는 산성비에 시꺼멓게 변색이 되고, 허옇게 녹아내려 부식되고, 외부가 떨어져 나가거나 벗겨져서 모양이 말이 아니었다. 거북선 모양의 대첩비를 돌았다. 갑자기 확 트이는 풍경. 한산대첩의 현장이었던 한산도 앞바다의 풍경이 그림처럼 펼쳐져 있었다. 가슴이 탁 트이도록 시야를 채워오는 망망한 바다. 그리고 점점이 떠 있는 작고 큰 섬들. 아름다웠다. 통제사도 여기에 서서 자신을 조여 오는 수많은 칼의 노래를 들었으리라. 쓸쓸한 가슴에 온통 내려앉는 푸른 바다 색이 슬프도록 쓸쓸했다.
한준희(경명여고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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