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매니큐어병 10여개가 앉은뱅이 탁자 위에 소복하다. 혹여 잘못 칠하면 지워야 하기에 지우개 용도로 쓰는 알코올도 준비했다. 손톱 발톱의 미용이나 디자인을 하는 사람, 네일아티스트를 꿈꾸는 영임이는 올해 열여덟살이다. 가로 1.5m, 세로 2m 크기의 침대는 엄마와 단 둘이 살고 있는 영임이에게 작업실이자 침실이다. 6일 오후 작업실 위에 준비를 마친 영임이는 그간 네일아트 연습대상이었던 엄마의 손톱을 꼼꼼하게 뜯어보고 있었다. 엄마에게 영임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어버이날 선물은 손톱 치장.
"내가 손톱 치장을 해서 뭘 하냐? 네 손톱을 예쁘게 해야지."
말은 그렇게 해도 엄마는 쑥 내민 손을 거둘 줄 모른다. 딸이 자신에게 해줄 수 있는 유일한 선물임을 알고 있어서다. 영임이가 중학교 2학년이던 2005년 9월. 뼈에서 발생한 골수암이 왼쪽 허벅지에 퍼진 것을 알고 치료를 시작했을 때부터 영임이는 네일아티스트를 꿈꿔왔다. 모든 암에 재발의 위험이 있듯 지금도 간과 난소에 이상징후가 나타나고 있지만 영임이는 "손톱만한 암세포가 별 대수냐?"고 맞선다. 그런 영임이가 왼쪽 다리를 쭉 편 채 엄마의 손가락 끝을 부여잡고 있었다. 엄마의 손가락 위에 그림을 그리듯 붓을 들고 이렇게, 저렇게 그림을 넣어본다.
아직 부기가 덜 빠진 영임이의 허벅지 바깥쪽엔 30cm 정도 꿰맨 흔적이 남아 있다. 허벅지뼈에 생긴 암세포를 들어내고 인공관절을 심었다. 앉아있을 때는 몰랐지만 네일아트 재료를 가지러 간다며 일어서서 걷는 영임이의 걸음은 부자연스러웠다. 한창 클 나이에 오른쪽 다리와 왼쪽 다리의 성장이 다른 탓이었다.
"엄마도 아팠는데요, 지금은 괜찮아져서 좋아요. 집에 아픈 사람밖에 없으면 얼마나 우울한지 몰라요."
장애 4급 판정을 받은 자신은 아랑곳않고 엄마의 건강을 염려하는 영임이. 딸에게 미안한 마음뿐이라는 엄마 김은수(가명·47)씨는 간간이 들어오는 일용직 일감에 나설 만큼 기력을 회복했다. 만성 어깨통증에 시달리던 엄마는 그래도 시름을 놓지 못했다. 기초생활수급권자로 정부로부터 받는 40여만원의 지원금으로는 영임이의 꿈을 이뤄주지 못할 것 같아서였다.
"어디서, 어떻게 했는지 네일아트 학원에서 무료로 기술을 배울 수 있게 됐다더군요. 항암치료 때문에 머리털도 채 나지 않은 것이…. 언제 죽을지 모르는데 좋다며 환하게 웃는 모습을 보니 눈물이 왈칵 솟더군요."
통근 항암치료를 하면서 1주일에 3번, 하루 3시간씩 수업을 듣던 딸은 억척스러웠다. 덜 자란 머리카락 탓에 모자를 쓰고 수성구 만촌동 집에서 중구 반월당까지 오가기를 석 달. 집에 오면 온몸이 무너지면서 침대에 몸을 뉘어야 했던 딸은 네일테크니션 2급 자격증을 따냈다. 1급 자격증 필기시험도 통과한 영임이는 실기시험을 눈앞에 두고 있다. 엄마에게 원서접수비를 달라는 말을 못해 2월엔 시험을 포기하기도 했다. 그런데도 엄마는 딸을 혼내지 못했다. 오히려 영임이가 자신보다 강할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남편을 심장마비로 잃은 지 10년입니다. 기사회생한 딸의 꿈까지 잃는다면 저 세상에 간 남편 앞에 할 말이 없을 것 같네요."
나약해지는 엄마의 손톱에 수를 놓는 영임이의 손은 엄마를 굳건히 잡고 있었다. "그까짓 암이 대수야? 겨우 요만한 건데"라며 영임이가 쥔 붓은 엄마의 손톱 위를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김태진기자 jiny@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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