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매일춘추] 성 범죄에 관한 단상

이태 전, 어느 유력 정치인이 모 일간지의 정당 출입기자를 성추행해서 물의를 일으킨 적이 있었다. '술집 여주인인 줄 알고 그랬다'는 궁색한 변명은 더 논란거리를 제공했고, 사실 여부야 어쨌든 사회적으로 파장을 일으켰던 것만은 분명하다.

그 사건이 언론매체를 타고 우리 집으로 들어왔을 때 남편의 반응은 가관이었다. '기자면 취재로 자신의 본분이나 다하면 그만이지 왜 정치인들, 그것도 남자들의 술자리까지 같이 해야만 했을까'라며 자신의 일인 양 흥분을 하기 시작하더니 수위를 높여가며 힐난이 이어졌다. 그렇다고 그냥 듣고만 있을 나도 아니다. 늘 그렇듯이, 이렇게 시작된 우리 부부의 논쟁은 급기야는 부부싸움으로 번지게 되고, 싸움의 원래 동기에서 한참을 벗어나 서로에게 생채기를 내고서야 휴지기에 들어서게 된다.

집에 양상군자의 예기치 못한 방문으로 귀중품이 도난당했다고 가정을 해보자. 이 때 우리는 남의 물건을 탐한 도둑을 나무랄 것인가, 아니면 문단속의 허술로 사건의 단초를 제공했다며 집주인에게 비난의 화살을 쏠 것인가.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는 성범죄에 관한 잣대도 이와 다르지 않다. 행여, '원인제공자'라는 구실로 피해자에게 그 책임을 은연중에 전가한 것은 아닌가에 대해 점검할 필요가 있다. 남성 중심적이고 가부장적인 성문화에서 여성에 대한 남성의 지배와 통제는 합리화 내지는 정당화되었고, 빠르게 확산되는 성 개방풍조와 자극적인 성 상품화 그리고 왜곡된 성 의식에 기반한 여성의 성적 대상화 등 보편적인 사회적 통념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통념들은 위력을 발휘하면서 오히려 피해자에게 칼끝을 들이대고 있어서 이중고통 속에 성범죄는 은폐되고 그 심각성이 알려지지 못한 경우도 허다하다.

올해 10월부터 상습 또는 어린이 대상 성폭력사범에게 채워질 전자발찌 및 위치추적 시스템이 처음으로 일반에 공개됐다는 보도가 있었다. 이런 제도를 도입해서라도 성범죄에 대처하겠다는 의지가 반가운 일이기는 하다. 아직도 견고하게 작동되는 가부장제하에서 사회적 합의를 도출한 것도 획기적인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염려스러운 것은 성에 대한 이중적 규범 그리고 남성의 성에 대한 허용적인 태도, 성의 상품화 등의 사회적 통념들은 그대로인 채 처벌에만 초점이 맞춰진 것은 아닐까 하는 것이다. 물리적인 처벌도구 채택에 앞서 우리의 성 가치관에 대한 점검이 우선되어야 한다. 사회적인 성인식의 변화와 성 평등 사회의 정착이 선행되지 않는 한 이런 도구들은 무용지물이 되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아울러 전자발찌가 장착대상을 찾지 못해 제 기능을 다하지 못하는, 전자(前者)와는 다른 의미의 무용지물이 되는 날을 기대해 본다.

김향숙(한국가정법률상담소 대구지부 상담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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