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말 하기 위해 출가했고 말 들어주려 절 지었죠" '묵언마을' 지개야 스님

굽은 나무로 절을 짓고 사는 이가 있다. 그는 말을 하기 위해 출가를 했고, 말을 들어주기 위해 절을 지었으며, '묵언(默言)마을'이라 이름 붙였다. 지개야(祉■也·57) 스님. 복을 구걸하는 거지란 뜻이다. 그가 진정 세상을 향해 구걸하는 것은 무엇일까.

지난달 25일 경기도 안성시 죽산면 칠장리 전통 한옥 형태의 사찰인 묵언마을을 찾았다. 그가 보낸 이메일 끝에는 '물처럼, 바람처럼, 때론 망부석같이 헌 신짝같이 닭벼슬보다 못한 중(僧)벼슬로 세월에 노를 젓는 복거지 지개야 합장'이라 적혀 있었다.

◆'틀'을 깨는 삶

차 소리가 들렸는지 그가 방문을 열고 나왔다. 합장을 하고 맞잡은 손이 작고 부드러웠다. 때묻은 슬리퍼에 까칠한 수염, 승복을 입고 나온 그는 생각보다 왜소했다. 그가 한평 남짓한 황토방으로 손을 잡아 끌었다. 그가 익숙한 손놀림으로 차를 냈다. 직접 만든 차라 했다. "자연의 모든 게 다 차(茶)란 말이야. 자연은 서로가 도우면서 살아. 나를 보호하기 위해 뿜어낸 독이 너에게는 약이 되는거야."

그가 하얀 백자 찻잔을 들어보였다. "이게 뭔줄 알아요? 이 찻잔이 옛날 간장종지입니다. 받침대는 밥상 접시예요. 당진의 백토로 만든 백자예요. 찬물을 따라 먹어도 맛이 더 좋아. 그런데 100년이 되도 여기에 차를 담아 마실 생각은 못하는 거야. 이게 이 종지가 평생 젓가락으로 쑤심만 당한거야. 그런데 이 놈이 묵언마을에 와서 님의 입술을 빨아먹는 찻잔이 됐지."

틀을 깨는 삶. 굽은 소나무로 절을 짓고, 산천의 잎을 뜯어 차를 만들고, 간장 종지에 차를 담아 마시는 행동들. 그의 삶의 수단은 고정관념을 버리는 데서 출발한다. "알을 깨야 병아리가 나오잖아요. 우리가 어떤 틀에 매이면 자유로운 나의 생각이 이뤄질수가 없는거야. 나무는 똑발라야 집을 짓는다는 생각, 간장종지는 100년이 지나도 간장종지라는 생각. 이런 틀을 벗어나야 우리의 사고력이 넓어지죠."

그가 출가를 한건 지난 2004년. 그의 나이 51세때였다. "2003년 통계에 관한 언론보도를 봤는데 지구촌 65억 인구 중 45억명이 밥이 없어 굶고 나머지는 살을 빼기 위해 굶어요. 하루에 3만5천여명의 어린이가 굶어 죽어 가고 있는가 하면, 우리 사회는 45분마다 한 사람씩 자살을 한답니다. 우리 이웃이 45분마다 한명씩 죽어가도 이 사람들이 하소연하러 갈 곳이 없는 거예요. 도시의 십자가는 하늘을 찌르고 천년 고찰은 외국 대리석으로 온몸을 치장해도 자살을 하러가는 사람이 면담을 신청해도 아무도 안 받아줍니다. 강건너 불구경이지. 그러면 누군가가 하기 바라기보다 내가 한 사람이라도 건지면 좋겠다 해서 출가한 거지."

언론보도만으로 출가를 한다니, 게다가 사재까지 모두 털어 절을 짓다니. 선뜻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내가 살아있을 때 번 돈을 사회에 환원하는 방법이라고 생각하면 되지. 처음에는 그냥 조용하게 살다가 죽으려고 했는데 그게 안 되더라고. 그것도 인연이지." 사회 환원 방법이 '중'밖에는 없었을까. "내가 승려라는 명찰을 달지 않고 사람들에게 상담을 하면 사람들이 아주 낮게 받아들여. 똑같은 말이라도 효과가 극대화하면 좋겠지요." 출가는 그 혼자만의 문제가 아니다. 가족들의 삶도 완전히 달라졌다. 그를 따라 아내도 출가(태고종)를 했다. 속세의 연을 끊은 부부는 아직 묵언마을에 함께 있지만, 조만간 강원도 영월 등 다른 지역에 제2의 묵언마을을 지으면 떠날 계획이라 했다.

◆마음다친 사람들의 쉼터

묵언마을은 굽은 소나무와 황토로 지은 절이다. 그가 2년동안 전국을 돌며 구해온 200년 이상된 나무들이다. 아무도 쓰지 않기에 더 크고, 단단하게 자랐다. 그는 5년에 걸친 공사 끝에 2층짜리 법당과 요사채 3개동이 달린 사찰을 지었다. 그가 쏟아부은 사재만 30억여원이다.

묵언마을 초입은 굽은 장승이 손님을 맞는다. 온통 절구통이 즐비하고 다듬이돌로 담을 둘렀다. 우마차 바퀴, 문짝, 항아리, 농기구 등 옛날 물건도 즐비하다. '법당', '구경칸', '똥칸' 직접 써낸 표찰이 웃음을 자아낸다. "25년 정도 모은 물건이에요. 예전에 경북 도의원을 할때 양반촌을 만들려고 했었지. 사업계획서까지 만들었는데 결국 무산됐어요." 설계도도 없이 지은 절이다.

왜 하필 굽은 나무일까. "그래야 얘깃거리가 되지. 하하. 굽은 나무는 모양 그대로 하는게 제일 힘을 많이 쓸 수 있어요. 보통 굽은 나무는 깎아서 펴서 쓰잖아. 그러면 오히려 나중에 기둥이 뒤틀어지고 돌아가요. 힘도 없고. 수백년을 굽어 살면서 가지를 달고 살았던 나무니, 굽은 그대로가 가장 강한거죠."

왜 '묵언마을'일까. "'묵언'은 달마대사가 면벽 9년 만에 이룬 참선의 아주 높은 차원이고 '마을'은 가슴의 대화가 있는 것을 말해요. 우리는 간지러운 입술의 대화는 있지만 뜨거운 가슴의 대화는 없는 시대에 살고 있는 거야. 옛 말에 '저 사람은 집도 절도 없는 사람이다' 그러잖아요. 집이 없으면 절에라도 가면 공짜로 밥을 주고 잘수도 있었다는 말인데 지금은 뭐냐. 잠 자고 공짜로 먹는 절은 아무데도 없다는 얘기야. 그래서 여기오면 마음을 열어놓고 쉬다가 다시 용기를 얻어서 세상으로 나가면 좋겠다 해서 하는 거예요." 그의 말처럼 묵언마을에는 몸과 마음이 갈 곳을 잃은 사람들이 드나든다.

인터뷰를 하던 중 낮 12시를 알리는 종소리가 났다. 점심공양시간이다. "12시예요? 밥 먹으러 갑시다. 절밥이야 찬이 없는게 찬이니까" 찬이 없어도 맛있는게 절밥이다. 밥과, 김치, 시래기, 멸치조림, 짠지, 두부 들어간 된장국과 순두부 찌개. 옛날 된장도 내왔다. 누런 콩빛이 그대로다. 그런데 순두부찌개에 돼지고기가 들었다. 그리고 멸치도 생선인데 절에서 이래도 되나? "절에서 고기 먹는다고? 불교를 종교로 하는 몽골에 가면 스님들이 세끼다 고기 먹어. 주식이 고기야. 살생이라는게 재미로, 이유없이 마구잡이로 생명을 죽이지 말라는 것이지 무조건 고기를 먹지 말라는 것은 아니에요. 그리고 여기 일하는 분들있는데 고기가 없으면 힘쓰기 힘들다 그래요. 그래서 부엌에서 요리하시는 분이 필요하다고 하면 해드시라고 해요. 어차피 부엌에서는 요리하는 사람이 대장이니까."

"많이들 찾아오죠?" 묻자, 그가 입안 가득 우물거리며 말을 이었다. "하루에도 20여명쯤 되어요. 사람이 오니 접대해야지. 자살하려고 마음을 먹은 사람이 오면 서너시간 정도 이야기하다가 그래도 모자라면 한달이고 두달이고 묵으면서 얘기하지. 마음이 달라져 이야기하면 내보내주고. 그런데 자살을 하는 사람들 사연을 들어보면 내가 들어봐도 죽어야 되겠어. 진짜로. 그런 사람들이 한 30여명. 처음에 묵언마을 지을때 한 사람의 자살이라도 방지하면 목적이 서겠다 했는데 30명이니 본전은 벌써 찾은 셈이지."

먹고 자는게 다 공짜라는데 운영은 어떻게 할까. "절을 다 말아먹는다고 하는데 내가 여기 30억원 들여 짓고 3억원으로 마이너스 통장을 만들었어요. 그러면 한달에 300만원씩만 써도 10년은 버틸수 있잖아. 10년 후에 형편이 정 어려우면 다른 사람한테 넘기면 되지 뭐. 그 때 일을 뭐하러 지금부터 걱정하나. 이 절을 짓는 순간 묵언마을은 더 이상 내 것이 아니에요. 여기 찾아온 사람들의 것이지."

◆산골 소년, 세상으로 나서다

그의 고향은 경북 안동 갈라산 자락이다. 그의 표현대로 '지금도 전기도, 사람도, 차도 더 이상 갈 수 없는 마지막 산골짜기'. "매일 하늘의 비행기만 보면서 꼴만 베고 가야 되나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 그 길로 고향을 나왔지." 낯선 도회지에서 어린 소년을 반겨주는 곳은 없었다. "배가 고파서 중국집 음식물쓰레기를 수돗물에 씻어 먹고 양복점에서도 일하고 방학 때는 구두도 닦고 볼펜 장사도하고 오만 짓을 다했어요." 그는 '희망'이라는 끈을 놓지 않았다. 19살에 검정고시로 농업고에 입학했고 졸업한 뒤 10년 만에 전문대에 들어갔다. 또다시 10년 만에 4년제 대학에 편입했고, 대학원을 두 곳이나 수료했다.

그가 돈을 벌게 된 건 1980년대 초 소 파동이 전국을 강타했을 당시였다. "안동축협에서 일하는데 소 한마리값이 12만원까지 떨어졌어요. 2년 전에 120만원 주고 사온 소가 말이야. 그런데도 내가 농부들한테 소를 먹이라고 설득하니 미친놈 소리를 들었어. 그래서 내가 소를 사서 넣은거야. 1천만원 대출을 내고 사비를 털어서 100마리를 샀어요." 그렇게 번 돈으로 도시에 집을 샀다. 소 값이 내리면 집을 담보로 소를 더 샀고, 소값이 오르면 소를 팔아 더 좋은 집을 샀다. "내가 소를 저울에 달아 파는 걸 최초로 만든 사람이야. 꽃등심이라는 말도 처음 만들었고, 우사에서 지붕을 덮고 소똥을 퇴비로 바꾸는 퇴비사를 만든 것도 저예요. 결국 사람들에게 돈 버는 기술 가르쳐주다가 내가 돈을 번거야."

산골 소년의 드라마틱한 변신은 경북 도의원 당선이었다. 소 키우는 일로 도의원을 만나려고 면담 신청을 해도 안 받아주자, 직접 해보겠다고 나선 게 계기였다. 3평짜리 사무실에 선거운동원 3명, 소형차 한대로 선거운동을 시작했다. "왜 그때는 선거구 주민들한테 밥도 사고 그랬잖아요. 그러면 나는 어디서 그런 모임이 있다고 하면 가서 앉아있어. 그리고 밥을 얻어먹어. 또 관광버스로 여행보내주면 나도 아침 일찍 모임 장소로 갑니다. 가서 사람들한테 인사하고 돌아다녀. 상대후보는 불법 선거 걸릴까봐 그 자리에 오지도 못해요. 돈은 상대 후보가 내고 생색은 내가 내는거지. 5천만원으로 선거를 했는데 돈이 남았어."

무한 경쟁 사회, 그가 굽은 나무로 전해주는 메시지는 무엇일까. "우리에게 민주가 없을때 공화(公和)의 힘으로 민주를 찾았어요. 많은 피와 눈물 그리고 투옥에 죽음까지 불사하며 찾았는데 그렇게 찾은 민주가 공화를 버린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는거야. 종로네거리에 육법전서를 깔고 앉아서 데모를 하는 것은 우리가 아니고 남의 민주야. 지금은 마을 길 넓힌다고 말뚝을 박으면 그걸 빼 집어던지면서 돈을 더내라는 시대에요. 숭례문에 불지른 할아버지는 보상금이 적다고 해서 불을 질렀다 이거야. 공화라는 생각, 우리라는 생각이 없는거지. 민주와 공화는 두 단어가 아니고 한 단어야 되는데 찾아준 공화를 민주가 버린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다는 것이지."

그는 '공화'를 되찾는 일을 계속할 계획이라 했다. "세상에 마음 아픈 사람이 너무 많아. 이걸로는 감당하지를 못해. 그래서 방을 24칸 정도 지어서 누구나 와서 잘 수 있게. 특히 재외동포들이 나이가 60~70이 되면 고향이 그리운데 막상 오면 옛 흔적이 하나도 없어. 그 흔적을 재현해주고 잃어버린 고향도 찾을 수 있게."

장성현기자 jacksoul@msnet.co.kr 사진·권정호 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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