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문학계의 거목 박경리씨가 지난 5일 타계했다. 그의 '토지'는 우리와 이 땅의 뿌리를 그린 역작이었다. '토지'에서 가장 흥미로운 것이 용이와 월선이의 끝없는 사랑이었다. 모진 운명에 가로막혀 평생을 가슴 속에 멍처럼 간직한 사랑, 거기에 둘의 현실은 왜 그리 가혹한지 가슴 아픈 사랑의 정수를 보여주었다.
그 둘의 사랑을 동성애 영화 '브로크백 마운틴'에 대입하는 것이 외람될까. 그러나 가슴을 면도칼로 저미는 듯한 사랑의 아픔은 에니스와 잭도 마찬가지다. 에니스와 잭이 더한 것은 그 어떤 축복도 받지 못하고, 그 누구에게도 발설할 수 없는 오롯이 둘만의 사랑이란 점이다.
지난 1월 에니스역을 맡았던 히스 레저가 29세로 요절하면서 그 아픔을 더해주고 있다.
와이오밍의 만년설이 덮인 산, 늑대 울음소리만 가득한 그 밤, 그 좁은 텐트에서 둘은 절절한 외로움을 달랜다. 처음부터 그럴 의도는 아니었다. 저녁에 마신 술이, 입김이 뿜어져 나오는 추위가, 아무도 없는 깊은 산이 둘의 살갗을 붙여놓았다. 이튿날 아침 둘은 화들짝 놀란다. 그리고 방목이 끝난 후 둘은 각자의 삶으로 돌아간다.
그러나 그것이 다가 아니었다. 결혼해 아이를 낳고, 적어도 남이 보기엔 그럴듯하게 살아가지만 둘은 끊임없이 그리워한다. 며칠을 가야 만날 수 있는 둘의 물리적 거리는 그리움 앞에서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어느 날 도착한 엽서 한 장. 둘은 낚시 도구를 챙겨 은밀한 둘만의 공간, 브로크백 마운틴으로 달려간다.
두 게이 카우보이의 20년간의 사랑을 그린 '브로크백 마운틴'은 2005년 베니스영화제 최우수 작품상(황금사자상), LA 비평가 협회 최우수 작품상, 뉴욕 비평가 협회 최우수 작품상 등을 휩쓸었고, 2006년 아카데미 8개부문 후보에 올라, 이안 감독이 동양인 최초로 아카데미 감독상을 수상했다. 보수적이고 완고한 아카데미가 동성애 영화에 감독상을 준 것은 이변이었다.
'브로크백 마운틴'이 동성애를 떠나 인간 실존에 대한 깊은 성찰을 보여 준 덕이었다.
시인 박미영은 '파괴되지 않고서는 나누어지지 않는 고통과 상처의 실존'이란 긴 시 제목을 달았다.
1960년대 미국에서 동성애는 그 어떤 것보다 끔찍한 죄악이었다. 벼랑과 협곡에 성기가 뽑힌 채 죽은 남자의 시신은 위험한 사랑의 대가였다. 야생마 갈기처럼 흔들리는 둘의 운명에 푸른 늑대가 운다. 브로크백 마운틴이 이고 있는 파란 하늘은 투명하게 시리다. 그 속에 길을 잃은 푸른 멍의 두 사나이, 나눠질 수 없는 사랑에 피울음을 운다.
희한하게 화가 박철호가 그린 작품에도 푸른빛이 전면에 번지고 있다. 차가우면서 냉혹한 현실, 파랑새처럼 이뤄질 수 없는 운명과 동의받지 못한 사랑에 대한 미련 등이 복합적으로 그려진 것이다.
만년 동안 덮여 있던 브로크백 마운틴의 눈이 쏟아지는 듯 어지럽다. 소용돌이치는 감정의 당혹감도 묻어난다.
잭의 유품을 받아든 에니스. 20년이 지났지만 그날 밤 입었던 옷이 그대로 보관돼 있다. 흙과 땀이 배어있는 그 옷에 얼굴을 파묻는다. 젊은 청춘, 잃어버린 시절, 다시 올 수 없는 애련, 삶에 대한 회한에 눈물을 흘린다.
그리고 조용한 혼잣말로 '맹세해'라고 읊조린다. 뭐를 맹세한다는 말일까. 둘의 사랑을, 너를, 아니면 그날 밤을? 목적어 없이 내뱉는 '맹세해'라는 말은 두고두고 가슴을 파고든다.
사는 것, 살아 있다는 것, 세상의 숨을 쉬고 있다는 실존의 무게가 느껴지기 때문이다. 영화의 마지막 윌리 넬슨의 노래 'He was a friend of mine'이 흐른다. 'was'라는 과거형 존재 단어가 이토록 슬픈 것도 그 때문이다.
그래서 '브로크백 마운틴'은 단순한 동성애가 아닌 벅찬 실존의 러브스토리다.
김중기기자 filmtong@msnet.co.kr
▨ 브로크백 마운틴(2005)
감독:이안
출연:제이크 질렌홀, 히스 레저
러닝타임/등급:133분/15세 관람가
줄거리:눈부신 만년설이 덮인 브로크백 마운틴. 양떼 방목장에서 여름 한철 함께 일하는 갓스물의 두 청년 에니스(히스 레저)와 잭(제이크 질렌할). 아무도 없는 산 속에서 둘은 우정 이상의 친밀함이 생긴다. 낯선 감정의 실체를 알지도 못한 채 둘은 각자의 삶으로 돌아간다. 그러나 결혼해 아이를 낳고 평범한 생활을 하던 이들은 그 감정이 일시적인 것이 아니었음을 알게 된다. 브로크백 마운틴에서 1년에 두 번씩 둘 만의 시간을 보낸다. 그러나 20년간 짧은 만남과 긴 이별을 반복하던 그들을 운명은 가만두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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