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 민다나오섬은 인구 2천만명에 남한보다 조금 작은 면적이며 고온다습한 전형적인 열대성기후이다. 토지가 비옥해 쌀·코코야자·마닐라삼·파인애플·바나나·커피 등의 농작물을 많이 재배하는 곳. 끝없이 펼쳐져있는 델몬트사의 파인애플과 바나나 농장을 볼 수 있다.
천혜의 자연조건임에도 불구하고 민다나오섬의 원주민들은 매우 열악한 환경 속에서 극빈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종교간 분쟁 때문이다.
민다나오섬은 원래 필리핀 이슬람교도들이 살던 곳이었는데 미국 식민시절, 그리스도교를 믿는 필리핀인이 대거 이주해와 이슬람교도이던 원주민들은 오지 쪽으로 밀려났다. 이것이 오늘날의 이슬람교도들과 그리스도교인들간 분쟁의 발단이 된 것.
현재 이곳은 신인민군(NPA), 모로민족해방전선(MNLF), 이슬람근본주의 아부사얍(MILF)등의 반군과 정부군이 대치 중이며 외국인 선교사와 사업가들의 납치가 종종 발생하기도 한다. 민다나오 주민들의 1인당 GNP는 1천달러를 넘지 않으며 필리핀에서 평균수명이 가장 낮고 문맹률은 가장 높은 곳이다.
지난 3월, NGO단체인 한국JTS(이사장 법륜스님) 등과 함께 민다나오를 찾았다. 비행기를 갈아타고 다시 비포장길을 3시간여 달려 도착한 곳은 송코(songco). JTS는 원주민 문화도 보존하면서 민다나오 문화, 평화에 기여할 수 있는 상징적인 건물로 짓자는 요청을 받아 만든 평화센터(Hall of Peace) 준공식에 참석한 것이다. 송코에 도착하자 각양각색의 원주민 전통의상을 입은 주민들이 우리 일행을 반겼다. 마치 설날 색동저고리를 입고 마을을 뛰어노는 우리네 아이들이 연상되는 풍경이다.
주민들은 우리를 위해 그들의 주식인 키모테(고구마와 비슷하다)와 탈라마니스, 슈만 등 전통음식을 정성스레 내놓는다. 여러 음식 중 특별히 눈길을 끄는 것은 바로 커피. 세계 오지를 다니다보면 커피를 보기조차 힘든데, 여기서 재배한 커피를 냄비처럼 생긴 커다란 통에 담아 은은한 향을 만끽하며 원없이 마시는 호사를 누릴 수 있었다.
오찬 후에는 원주민들의 전통문화공연이 이어졌다. 이곳 아이들은 걸음마를 떼기 시작한 후부터 춤을 배우기 시작할 정도로 춤을 즐긴다. 유아들은 수리매춤과 개구리처럼 폴짝폴짝 뛰는 개구리춤을, 초등학생 크기의 아이들은 창과 방패춤을 추고, 어른들은 어른들만의 수리매춤과 창과 방패춤을 춘다. 아이들의 앙증맞은 모습과 어른들의 열정적인 모습들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잠시 벤치에 앉아 있던 나에게 한 아이(리즐, Rezel)가 다가왔다. 그 아이는 낯선 이방인인 내게 궁금한 것들을 물어오기 시작했다. "한국은 어떤 나라예요?""음…한국은 사람도 많고 차도 많고 건물도 많고, 엄청 복잡한 나라란다.""와우~대단해요. 저도 꼭 한번 가보고 싶어요.""가면 되지. 한국은 그리 먼 나라가 아니야.""음…전 아마도 갈 수 없을 것 같아요. 아마 전 여기에서 평생 살아야할 것 같아요."그러면서 리즐이 고개를 숙이던 그 순간, 나는 그 아이의 눈에 고인 눈물을 보았다. 이곳에서 평생을 살아야한다…
리즐의 체념한 듯 힘빠진 말과 눈물을 보는 순간 감정에 북받쳐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내렸다. 무어라 그 아이에게 희망을 주고 싶은데 영어로는 의미 전달이 쉽지 않아 통역을 불러 원주민어로 통역을 부탁했다. "반드시 희망을 품고 포기하지 않으면 한국이든 어디든 네가 원하는 곳에 갈 수 있고, 네의 꿈을 이룰 수 있을 것"이라고. 그래도 리즐은 잘 모르겠다고 힘없이 대답했다.
분위기 전환을 해야겠단 생각이 든 나는 준비해간 폴라로이드 카메라로 리즐의 사진을 찍어주고, 준비해간 다이어리와 볼펜을 선물로 주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13살 달란틱 부족의 소녀 리즐을 보며 참 많은 것을 생각하고 느낄 수 있었다. 나는 얼마나 행복한가, 나는 얼마나 풍요한 삶을 살고 있는가에 대해서 말이다.
오후부터 시작된 송코마을의 축제는 밤늦은 시간까지 계속 이어졌다. 흥겨운 북소리에 맞춰 원주민들과 우리일행은 그 시간 만큼은 하나가 돼 그들의 전통춤을 추며 분쟁의 땅에 평화의 씨앗이 하루 빨리 뿌리내리기를 바라는 같은 희망을 품어본다.
김재송(포토그래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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