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우순필씨 가족이 전하는 '가즈토의 인생역정'

1945년 10월 패전의 혼란 속에 영양실조로 쓰러진 일본 아이를 12년간 키웠던 우순필씨의 가족이 본사로 연락을 해왔다.(본지 13일자 7면 보도). 우순필씨의 둘째 아들인 이재윤(70·㈜건영기계 대표이사)씨는 13일자 매일신문을 보고 "이재건씨는 바로 위에 형님입니다"고 알려왔다. 히로하타 가즈토(한국명 이재건)씨는 일본 가족과 해후한 뒤에도 2년에 한번씩 선물 한아름을 안고 대구를 찾아오곤 했다. 위암으로 세상을 뜨기 직전 일본 가족들에게 "유골을 2개로 나눠 하나는 대구 무태에 묻어달라"는 유언을 남길 정도로 한국을 사랑했다.

14일 이재윤씨는 우순필씨 가족을 애타게 찾던 이재건씨의 친구 신현하씨와 연락을 했다. 이씨에게서 형 이재건씨의 파란만장한 인생사를 들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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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10월이었습니다. 거지생활을 하며 영양실조로 쓰러진 일본 아이를 어머니(고 우순필 여사)께서 데리고 오셨지요. 당시 집주소가 경북 달성군 공산면 서변동이었고 인천 이씨 집성촌이었습니다.

형님(가즈토)은 온순하고 낙천적이었는데 머리도 비상해 한국말을 쉽게 배웠습니다. 갸름하고 예쁜 얼굴이었고, 노래를 잘 불렀어요. 아리랑에서부터 각종 민요를 공책에 또박또박 적고는 모조리 외워 불렀으니까요.

어머니는 우리 4형제(이재덕, 이재윤, 이재국, 이재상)의 항렬을 따 '이재건'이라는 이름을 지었습니다. 호적에 입적까지 해 학교도 보냈지요. 한국인이 된 겁니다.

형님은 아버지께서 꾸려나가던 정미소에서 일하다 6·25가 끝나기 직전 징집영장을 받고 입대했습니다. 일본인 최초로 한국군에 입대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제주도훈련소에서 신병훈련을 받고 29사단에서 복무를 마쳤습니다. 복무 당시 '일본 스파이'로 몰려 수사도 받았지요.

제대 직전 수소문하던 일본 가족들로부터 연락을 받게됐습니다. 일본 언론사에서 가족들을 찾아줬어요. 어머니는 형님에게 "못해줘서 참 미안타"며 울면서 떠나보냈는데 오히려 형님이 어머니를 위로했지요. 어머니는 유난히 손재주가 많던 형님을 참 그리워하셨어요.

형님은 일본으로 돌아가 대학교에 진학한 뒤 금은방으로 큰돈을 벌었습니다. 수시로 편지를 보냈고, 2년에 한번씩 대구를 찾아와 선물보따리를 풀었습니다. 한국에서 돌아가신 친어머니 유골을 향촌동 한 골목에 있던 '대안사'라는 절에 묻었는데 이 절이 사라지면서 잃게 돼 크게 슬퍼하기도 했습니다.

어머니는 형님이 찾아올 때마다 한복을 만들어줬고, 동네잔치를 했습니다. 형님은 하모니카 연주로 보답했지요.

형님이 한차례 이혼한 것도 한국과 한국인을 무시하는 아내 때문이었답니다. 그렇게 꾸준히 연락을 해오다 1990년 위암으로 돌아가셨지요. 그때 일본으로 우리 4형제가 찾아갔는데 유골함이 2개가 있더라구요. 제2의 고향인 한국에 묻어달라고 유언을 남기셨대요.

"한국과 일본 사이에서 내 삶은 한편의 드라마 같고, 다큐멘터리 같다. 한일교류를 위해 혼자 애썼다. 한국과 일본이 이웃사촌으로 잘 지내길 바란다"고 하셨대요.

그 소식을 전해들은 어머니는 시름시름 앓다 형님이 돌아가신 2년 뒤 운명하셨습니다.

어머니는 돌아가시면서 형님을 호적에 올린 그날, 동네에 소문이 나서 아이들이 "일본놈을 쫓아내라"며 돌팔매질한 것을 모두 몸으로 막으셨는데 그때가 생각난다고 하셨어요.

서상현기자 ssang@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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