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모 라디오방송의 프로그램에 게스트로 참여한 적이 있다. 상담동네에 몸을 담고 있다는 연유로 초대받은 듯했다. 슬며시, 과거의 시간 속에 은둔하고 있던 라디오에 대한 추억이 되살아났다.
지금처럼 대중매체가 그리 발달하지 못했던 예전에는 누구나 한번쯤은 라디오와 애착관계에 빠지는 것처럼, 여학교시절에 나도 예외는 아니었다. 혼자만의 공간에서 라디오와 애정행각을 벌이기가 일쑤였다. 삶의 무게인양 제 몸보다 더 큰 배터리를 등에 업고 굵은 고무줄을 허리춤에 질끈 동여맨 트랜지스터라디오는 나의 사춘기를 함께 앓아 준 동반자였다. 돌이켜보면, 바라만 보던 외사랑이었지만 홀쭉했던 정서를 그나마 살지게 하는 몇 안 되는 일상 중의 하나였다. 음악프로그램을 듣다가 하얀 관제엽서에 깨알 같은 정성을 쏟아부어 사연과 신청곡을 적어 보내는 용기도 내보곤 했다. 엽서는 라디오를 향한 외사랑의 귀한 언어요 연결고리였던 셈이다. 아날로그시대에 매체와의 나름의 소통방식이었다. 더러는 신청곡을 띄우고 방송 날짜를 손꼽아 기다리다 보면 당시의 느낌은 희석되어 생뚱맞기도 했고, 비오는 날의 물기 머금은 사연은 정작 전파를 타는 순간엔 쨍쨍한 햇빛이 느낌을 대신 전하기도 했지만.
수십 년의 세월을 훌쩍 넘긴 지금, 내게 있어 라디오의 정체성은 도로정체를 피하기 위한 정보를 제공받거나 운전의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습관적으로 켜두는 정도이다. 세월에 결어 탈색된 옛사랑 같은 존재다. 사춘기시절의 열정과 섬세함도 닳아버린 연필심처럼 무디어져 버렸다.
그러던 차에 가까이서 본 라디오 스튜디오의 풍경은 경이로웠다. 청취자들이 실시간 보내오는 사연과 음악이 전달되고 피드백이 오가는 공유의 장(場)으로 스피드시대임을 실감케 한다. 디지털 시대답게 온, 오프라인을 넘나들며 서로의 커뮤니케이션에 대해 공감과 반응하는 '건강한 소통'을 통해 대중매체와 청취자 간의 상호작용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일방적으로 메시지를 전달하는 송신자와 수동적으로 받기만 하던 수신자의 관계에서, 화자(話者)와 청자(聽者)로 자리를 바꾸어 가며 상호교환성을 실현하는 수평적인 관계로의 진화이다.
소통은 어려워도 단절은 쉽다. 소통은 상대에 대한 이해와 존중, 그리고 배려를 바탕으로 교감이 이루어지지만 단절은 불신을 초래한다. 나는 누군가와 진정으로 교류하고 제대로 소통하고 있을까, 거죽에 '상담자'라는 옷을 걸친 탓에 행여 경청한다고 자만하며 실은 일방적으로 내뱉기만 하는 변질을 일삼지는 않았을까, 걱정과 부끄러움이 한통속이 되어 스멀스멀 기어 나온다. 내 안에 커다란 장벽을 숨겨둔 것은 아닌지 심호흡을 하며 찬찬히 훑어봐야겠다.
김향숙(한국가정법률상담소 대구지부 상담원)
댓글 많은 뉴스
국힘 김상욱 "尹 탄핵 기각되면 죽을 때까지 단식"
[단독] 경주에 근무했던 일부 기관장들 경주신라CC에서 부킹·그린피 '특혜 라운딩'
[정진호의 매일내일(每日來日)] 3·1절에 돌아보는 극우 기독교 출현 연대기
민주 "이재명 암살 계획 제보…신변보호 요청 검토"
김세환 "아들 잘 부탁"…선관위, 면접위원까지 교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