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송나라 휘종황제는 그림을 몹시 좋아하는 임금이었다. 그는 곧잘 유명한 시 가운데 한 두 구절을 골라 이를 화제(畵題)로 내놓곤 했다. 한번은'꽃 밟으며 돌아가니 말발굽에 향내 나네(踏花歸去馬蹄香)'라는 화제가 주어졌다. 말발굽에서 나는 꽃향기를 그리라는 주문에 모든 궁정화가들이 손도 대지 못하고 끙끙거리고 있을 때 한 젊은 화가가 그림을 제출했다.
달리는 말의 꽁무니를 따라 나비 떼가 뒤쫓아 가는 그림이었다. 말발굽에 향기가 나므로 나비는 꽃인 줄 오인해 말의 꽁무니를 따라 간 것이다.
대구의 강북, 칠곡 구암동에 있는 운암지에서 함지산 정상에 이르는 산책로에는 운동삼아 산길을 돌아 내려오는 사람들의 등 뒤로 희고 노란 나비 두어 마리가 나풀거리며 뒤따르는 모습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도심 속에선 좀체 보기 힘든 풍경이다.
설레는 봄빛은 많다고 꼭 좋은 것만은 아닌 모양이다. 정오를 갓 지난 봄날 뙤약볕은 따갑다 못해 무덥기까지 하다. 이런 차에 운암지 한가운데서 힘차게 물을 뿜는 분수줄기는 한눈에 시원한 청량감을 안겨준다. 수변공원 안에는 뙤약볕을 피해 나들이 나온 시민들이 청단풍나무 그늘 아래서 한가로운 오후 한 때를 보내고 있다.
운암지를 가로질러 함지산 정상으로 가는 오솔길. 한껏 초록빛을 머금은 나뭇가지 끝이 하늘로 뻗어 심술궂은 5월의 햇볕을 가려주는 흙길은 타박타박한 땅의 느낌을 발끝으로 전한다. 몇 발자국 가지 않아 산 능선에서 한 줄기 소슬바람이 불어오자 초록물결이 일제히 살랑거리며, 쏴아~하는 파도소리를 들려준다. 비탈길을 오르내리는 산책객들의 발걸음도 한결 가볍다.
약간 가파른 등산로의 양편에는 아기손톱만한 노란 야생화들이 수목의 그늘을 비집고 들어온 빛을 좇고 있다. 그렇다고 함지산 오솔길은 숲길 전경만 펼쳐지는 것은 아니다. 체육공원이며 쉼터가 있어 나른한 오후 춘곤증을 풀거나 휴식을 취할 수도 있다.
천천히 30여분쯤 걸어 중간 쉼터에 다다를 즈음, 아카시아 향기가 코를 찌른다. 고개를 들자 하늘 가득 하얀 아카시아꽃들이 눈앞에 주렁주렁 열려 있다. 진동하는 향기는 산책객의 옷으로 스며들 정도다. 조금 전 밑에서 봤던 나비들이 산책객들의 등 뒤를 따르던 풍경은 바로 이 아카시아 향기 때문이다.
중간 쉼터에 닿자 오른쪽이 함지산 정상 가는 길이고 왼쪽이 망일봉 가는 길이다. 한숨을 돌리고 이마에 맺힌 땀을 훔친 후 오른쪽 길로 접어들었다.
함지산은 산의 생김새가 함지박을 엎어 놓은 것 같다고 해서 함지산 또는'방티산'으로 불린다. 해발 287.7m의 낮은 산이지만 정상을 향하는 길은 어느새 허리 아래 높이의 관목들이 주종을 이루고 있다.
드문드문 자라고 있는 아카시아나무도 아직 관목을 벗어나지 못했다. 다만 향기 만큼은 정상방향 능선을 따라 솔솔 피워내고 있다. 그 향기를 좇아 큼직한 등에과 곤충 한 마리가 '윙윙' 날개소리를 내며 열심히 꿀을 찾아다니고 있다.
능선을 따라 걸으면 오른편으로 강북지구 아파트단지가 한눈에 들어온다. 그 너머로 팔공산의 연봉들이 강북지구를 둘러싸고 있는 형국이다. 반대편은 팔거천을 따라 금호강까지 이어지는 산봉우리들이 마주하고 있다.
정상에는 미풍이 불어온다. 오솔길 초입의 운암지는 산자락에 가려 보이질 않는다. 몇몇 사람들이 잠시 머문 정상을 뒤로 하고 또 다른 능선을 따라 발걸음을 옮긴다.
함지산 길은 운암지~함지산 정상까지 약 2km의 오솔길 외에도 7개의 길이 더 나있다. 어느 길을 가더라도 넉넉한 함지박을 닮은 함지산으로 통한다.
우문기기자 pody2@msnet.co.kr 사진 정재호기자 newj@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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