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지난 2일 밤 서울 청계천 광장. 1만여명의 시민이 참석한 이날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촛불문화제에서 이색적인 일이 벌어졌다. 광우병 수입을 반대하는 시민들의 구호가 속칭 '조중동'(조선·중앙·동아일보)이라는 보수 성향 메이저 신문사에 대한 '안티 구호'로 비화됐다. 시민들은 "조중동 반성해라" "조중동은 찌라시"라고 외쳐댔다. 불똥은 집회현장과 인접한 ○○일보로 튀었다. 시민들은 "전기료가 아깝다. ○○일보 불 꺼라"를 연호했다. 시민들의 외침이 수그러들 줄 모르자 ○○일보는 급기야 간판의 불을 끄는 수모를 겪었다.
#2='미국산 쇠고기 수입반대 촛불집회에 참여하는 대역죄를 저질렀으니 부디 처벌을 부탁합니다.'
경찰이 광우병 촛불 집회의 주최자와 이명박 대통령 탄핵서명운동과 관련한 명예훼손 행위에 대해 사법 처리 방침을 밝힌 14일 경찰청의 홈페이지가 사이버 시위로 마비 상태에 빠졌다. 실명제로 운영되는 경찰청 홈페이지에 네티즌들이 '항의성 자수글'을 대거 올린 것은 초유의 일이다. 경찰청의 열린게시판에는 수천개의 비난글이 쇄도했다.
◆거리로 나선 키보드 워리어
위 두 사건은 미국산 쇠고기 졸속 협상으로 촉발된 찬반 양측의 첨예한 대립과 헤게모니 공방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그 이면에는 여론 형성 주도권을 둘러싼 보수 진영과 네티즌들 간의 치열한 헤게모니 기세 싸움이 흐르고 있다.
이번 헤게모니 싸움에는 속칭 '키보드 워리어(Keyboard Warrior)'들이 대거 참여했다는 점이 새롭다. 키보드 워리어란 인터넷 공간에서 활발히 활동하지만 현실에서는 무기력하고 소심한 네티즌들을 일컫는 말. 요즘의 그들은 인터넷 커뮤니티나 블로그를 통해 정보와 의견을 교환하며 문자 메시지를 통해 촛불 집회 참여를 독려하는 등 현실 참여 성향을 드러내고 있다.
키보드 워리어에 의해 대통령 탄핵 서명 운동이 시작된 것도 초유의 일이다. 지난달 초 한 고교생은 다음(www.daum.net)의 사이버 토론광장인 아고라에서 대통령 탄핵 서명 운동을 시작했다. 14일 오후 현재 서명자는 130만명을 넘어섰다.
◆보수 진영의 반격
이들의 움직임에 대한 보수 진영의 반격도 만만찮다. 조선일보는 이달 2일자 사설 'TV 광우병 부풀리기 도를 넘었다'를 통해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움직임을 괴담으로 정의했다. 촛불시위 현장에 나온 학생들을 두고 비과학적인 선동에 의해 '인터넷 세뇌(洗腦)'당한 것으로 평가하는 칼럼도 실었다.
보수 성향의 주요신문들은 '인터넷에서 유통되는 정보는 여과장치가 없다'면서 네티즌들의 최근 움직임에 대해 우려감을 숨기지 않았고, 보수 성향의 인터넷 매체들도 비슷한 논조로 정부를 측면 지원하고 나섰다. 보수논객 변희재씨는 빅뉴스 칼럼을 통해 '진보적인 매체가 자극적인 언어로 여론을 선동하는 데 집중하고 있다. 쇠고기 수입 반대 여론은 젊은층의 현 정부에 대한 불신, 뿌리깊은 반미의식 등이 결합되었고 이를 진보좌파 정치세력이 이용하고 있는 형국'이라고 규정했다.
미국산 쇠고기 사태를 둘러싼 정부 측의 대응이 '공안(公安) 정치'를 닮았다는 지적도 있다. 한승수 국무총리는 지난 8일 대국민 담화에서 "국민들이 알지도 못하고 길거리에 나온 것"이라며 깎아내렸다. 경찰은 괴담을 전파하거나 촛불집회를 주도하는 이에 대한 처벌 의사를 드러냈다. 이 같은 정부의 자세는 민심에 기름을 부은 격이 됐다.
◆이번 싸움은 리턴매치다
네티즌들과 보수 진영의 헤게모니 싸움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네티즌들의 정치적 영향력 행사는 5년 전의 16대 대선과 노무현 전 대통령 탄핵사태 때 극적으로 노출된 바 있다. 2002년 12월 19일 노무현 민주당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된 날 오마이뉴스는 "대한민국의 '주류'가 마침내 교체됐다"고 선언하기도 했다. 네티즌들이 전통적인 언론권력 조중동을 이겼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로부터 5년 뒤 양상은 반전했다. 유권자들은 '경제 살리기'라는 자신들의 행복을 위해 표를 행사했고, 수혜자는 보수 진영이었다. 김대중·노무현 정부를 '잃어버린 10년'으로 규정한 보수 진영은 제17대 대선과 제18대 총선에서 일어난 좌우 정권 교체를 축하하며, 정치적 영향력 회복을 과시했다. 반면 18대 총선에서 '20대 투표율 19%'라는 전례없는 정치적 무관심 현상이 나타나자, 네티즌들 사이에서는 "우리는 컴퓨터 앞에서만 온갖 말을 쏟아낼 뿐 현실 정치에 무관심하고 무기력한 키보드 싸움꾼에 불과하다"는 자괴성 글들이 많이 올랐다.
그런 가운데 빚어진 쇠고기 파동은 인수위의 영어 몰입교육 정책, '강부자' 내각 논란, 청와대 비서진들의 땅투기, 건강보험 민영화 논란, 대운하 강행 등으로 잠복해 있던 이들의 불만과 우려를 임계상황에 도달시켜 폭발하게 만든 계기가 됐다.
최진순 중앙대 신문방송학부 겸임교수는 "대통령이나 권력에 대해 자유롭게 비판하고 공방을 벌이는 것이 키보드 워리어들의 유희문화"라고 진단하고 "현재의 집권세력은 키보드 워리어들의 유희문화를 이해하려고도 않고 이해할 수도 없는 20세기의 화신(化身)이기에 이들과의 불화는 피할 수 없을 것"이라고 보았다.
조문호기자 news119@msnet.co.kr
▨ 키보드 워리어(Keyboard Warrior)=인터넷 공간에서 활발히 활동하지만 현실에서는 무기력하고 소심한 네티즌들을 일컫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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