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 전원을 켰다. 모 증권사 CF에서 로시니의 오페라 '세빌리야의 이발사' 1막1장, '나는 이 거리의 해결사'가 흘러나온다. 벗겨진 머리와 덥수룩한 턱수염, 불룩 튀어나온 배가 영락없는 루치아노 파바로티다. '피가로 싸~, 피가로 싸~' 수수료(Fee)가 낮다(Low)는 말처럼 들리는데 뭔가 좀 이상하다. 파바로티는 지난해 세상을 떠났다. 그렇다면 난데없는 브라운관 속 파바로티는 누굴까. 파바로티를 쏙 빼닮았지만 사실은 영국 출신의 대역 모델 콜린 밀러다.
이어지는 광고는 모 은행 CF. 이번 주인공은 '토크쇼의 여왕' 오프라 윈프리다. 방송인 박경림이 오프라 윈프리와 입담 대결을 펼친다. 방송 스튜디오도 오프라쇼와 닮은데다 방청객들도 대부분 외국인이다. 오프라 윈프리가 한국의 은행 광고까지 출연하다니. 꽤 한가했거나 형편이 어려워진걸까. 그런데 한참 들여다보니 아차 싶다. 흑인 여성은 오프라 윈프리의 이미테이션 모델이고 광고는 태국에서 제작됐다.
최근 브라운관에는 '이미테이션 모델'이 부쩍 늘고 있다. 톱스타들과 닮은 듯 다른 모델들을 기용한 광고들이 잇달아 전파를 타고 있다. 싼 몸값에 피식 웃게 만드는 재미, 광고 효과까지 얻을 수 있다는 게 이들의 매력.
사회적으로 파장을 일으켰던 톱스타의 패러디도 등장한다. 모 국제전화 CF는 지난해 온 국민의 이목이 집중됐던 가수 나훈아의 기자 회견 장면을 차용했다. 모여있는 취재진 앞에서 나훈아가 단상 위로 올라간다. '보여주면 믿겠습니까?' 가수 나훈아가 자신과 관련된 루머가 사실이 아니라며 바지춤을 부여잡던 딱 그 광경이다. 모델은 나훈아의 이미테이션 가수로 잘 알려진 너훈아다. 광고 하단에는 '본 광고는 유사모델을 활용한 패러디 형태의 광고입니다'라는 안내문이 나온다. 이 광고가 전파를 타는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한국방송광고심의위원회에서 "혼동할 우려가 있다"며 조건부 불가 판정을 내렸기 때문. 심의위는 해당 가수의 출연 동의서를 제출할 것을 요구했고, 우여곡절 끝에 조건부 방송가 판정을 받았다.
이 같은 광고 수법은 앰부시(Ambush) 마케팅 혹은 매복 마케팅이라고 불리는 광고 기법이다. 유명인을 닮은 이미테이션 모델을 사용해서 판매를 촉진하는 방법. 올림픽이나 월드컵 등 전세계적인 행사의 공식 스폰서가 아니면서 마치 스폰서인양 광고 활동을 펼치는 마케팅 기법이다.
앰부시 마케팅 광고는 마치 톱스타가 출연한 것 같은 느낌을 주기 때문에 쉽게 궁금증을 불러일으키고, 주목도가 높다. 특히 가짜이기 때문에 당연히 진짜 유명인을 출연시키는 것에 비해 제작비가 적게 든다.
이미테이션 모델은 유독 한국과 일본에서 선호된다. 전문가들은 "텔레비전 광고에서 유명인을 선호하는 한국의 독특한 문화적 특성 때문"이라고 말한다. 우리나라와 일본의 경우 TV 광고에서 유명인이 출연하는 비율이 57~60%에 이를 정도로 유명인을 선호한다. 반면 미국은 유명인이 등장하는 광고가 10%에 불과하다.
국내에서 유명인을 선호하는 것은 독특한 방송 광고의 역사 탓도 있다. 국내 방송광고는 1950년대 제약회사 광고로 출발했는데 당시 외국의 약 이름이 외우기 어렵고 발음하기 힘들자 유명인과 CM송을 이용해 이해하기 쉽도록 했다는 것. 안의진 영남대 언론정보학과 교수는 "카피모델에 대한 공식적인 연구 결과는 없지만 기본적으로 유명인과 비슷한 효과를 내면서 훨씬 저렴하다는 것이 장점"이라며 "앞으로도 주목 효과를 노리기 위해 꾸준히 등장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장성현기자 jacksoul@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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