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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에 약한 자 그대 이름은 '여자'…'색·계' 장아이링

일본의 상하이 강점 시절. 왕지아즈는 표면상 여대생이지만 내면은 자객이다. 2년 전 그녀는 빼어난 미모를 무기로 친일파 정보국 대장을 암살하려는 미인계를 펼쳤지만 실패한 바 있다. 2년 후 정보국 대장의 소재를 파악한 그녀는 다시 암살을 기도한다. 그녀는 암살 대상자의 정부(情婦)가 돼 호시탐탐 기회를 노린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남자의 매력에 빠져들고, 마지막 순간 남자에게 '위험'을 알려 도망치도록 한다. 암살을 포기한 대가로 그녀와 동료들은 체포돼 사형당한다.

중국 출신 작가 장아이링의 소설 '색, 계'의 줄거리이다. 이 소설은 리안 감독의 영화 '색, 계'로 만들어져 큰 인기를 끌었다. 장아이링의 작품은 최근까지 중국에서도 연구가 많지 않았으며 국내에는 리안 감독의 영화 '색, 계'를 통해 알려졌다.

영화 '색, 계'에서 여자 주인공 왕지아즈로 나왔던 실제 인물은 정핑루라는 여성이다. 그녀는 상하이 푸단 대학 교수로 있던 중국인 아버지와 일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빼어난 미모와 원만한 사회적 관계, 뛰어난 일본어 실력을 바탕으로 항일 지하공작에 참여했다. 1937년 7월 당시 중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던 '양우화보'의 130호 표지모델이기도 했다. 정핑루가 암살하려 했던 딩모춘(소설과 영화에는 이 선생)은 정핑루의 중학교 시절 교장으로 국민당 간부였다. 정핑루의 딩모춘 암살기도는 실제 있었던 사건이다.

'색, 계'는 이 사건을 소재로 1950년대에 창작돼 1979년 '중국시보'의 '인간부간'에 발표됐다. 그러나 장아이링의 소설 '색, 계'와 실제 사건에는 다소 차이가 있다.

실제 딩모춘 암살기도 장소는 모피 상점이었지만 소설에서는 보석 가게로 묘사된다. 또 현실에서는 딩모춘이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알고 도망쳤지만 소설에서는 왕지아즈가 이 선생에게 위험을 알리는 것으로 묘사된다. 또 실제 사건에서는 딩모춘이 정핑루의 미모가 아까워 살려주었고 이에 분개한 딩모춘의 아내 자오후이민이 그녀를 붙잡아 살해했다. 그러나 소설에서는 이 선생(딩모춘)이 처형을 명령하는 것으로 나타나 있다.

이 세가지 차이점은 작가가 소설을 쓴 이유이기도 하다. 작가는 왕지아즈의 변심을 통해 '사랑 앞에서 약점을 드러내고야 마는 여성의 모습'을 쓰고 싶었던 것이다. 실제로 작가의 소설 대부분이 '사랑 앞에 약한 여성'에 관한 것들이다. 또한 사랑 앞에서도 냉정한 남자와 그로 인한 여성의 피해를 그렸다.

작가는 전문적인 훈련을 받은 기관원이 아니라 여성의 특성, 여성의 약점을 고스란히 지닌 보통 여자를 그려내고 싶었다고 말한다. 소설이나 영화에서 왕지아즈가 변심하고 이 선생을 놓아주는 순간, 그녀는 자객에서 여인으로 다시 태어나는 셈이다. 이 장면은 리안 감독의 영화 초기 그녀가 암살자로 변신하기 위해 '처녀성'을 버리는 '몰인간화' 혹은 '부속품화'에서 '온전한 인간'으로 거듭나는 장면이기도 하다.

더불어 작가는 남성과 여성이 사랑을 대하는 태도에 대해 썼다. 사랑이라는 낭만 혹은 환상 앞에서 여성은 자신과 동료가 죽을 것을 알면서도 이 선생을 구하지만, 이 선생은 '독하지 않으면 남자가 아니다'며 자신을 구해준 그녀를 체포, 처형한다.

재미있는 것은 리안 감독은 이 장면을 다소 다르게 바라본다는 점이다. 영화는 이 선생이 텅 빈 왕지아즈의 침대에 앉아 그녀를 그리워하는 장면을 담고 있다. 마치 이 선생이 여전히 왕지아즈를 향한 사랑(환상)에 빠져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한 것이다. 김순진 인천대학교 중어중문과 초빙교수는 실제 사건과 다른 소설, 소설과 또 다른 영화에 대해 "아마도 이것은 장아이링과 다른 이안 감독의 젠더적 특성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평가한다. 하나의 사건을 두고, 여성 작가는 남성을 차갑게, 남성 감독은 남성을 다소 따뜻하게 그린 셈이다.

작가로서 명성과 자신의 원작을 바탕으로 한 영화 '색, 계'가 성공했지만 작가 장아이링의 삶은 불행했다. 그녀는 좋은 집안에서 태어났다. 조부는 청나라 관료였고 조모는 청나라 말기 양무운동을 주도한 리홍장의 딸이었다. 그러나 두살 때 어머니 유럽 유학을 시작으로 부모의 이혼, 계모와 불화로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학창시절 천재라는 이야기를 들을 만큼 명석했다. 1938년에 런던대에 1등으로 합격했지만 제2차 세계대전 발발로 유학을 포기하고 홍콩대에 입학했다. 1941년 일본군이 홍콩을 점령하자 공부를 중단하고 상하이로 돌아와 글을 쓰기 시작했다.

24세 때인 1944년 친일파 관료 후란청과 결혼했지만 남편에게 다른 여자가 있음을 알고 1년 6개월 만에 이혼했다. 1940년대 상하이의 천재작가로 평가받았지만 1945년 중국이 항전에서 승리한 후 친일파 남편 때문에 공공연하게 '말세작가'라는 지탄을 받았다. 문학 활동뿐만 아니라 사생활까지 공론화돼 비난받기 일쑤였다.

중국에 공산당 정부가 들어선 후에도 상하이에 머물며 적응하려고 노력했다. 공산당이 개최한 '상하이 문예공작자대표대회'에도 참여했다. 1950년 초 본명을 숨기고 필명으로 '열여덟의 봄' '소애'를 발표하기도 했다. 이 소설들은 정치적 상황에 맞춰 의도적으로 쓴 것인데 결국 실패로 끝났다.

1955년 그녀는 결국 중국을 떠나 이민자로 미국에 입국했다. 1956년 그녀는 뉴욕에서 36세의 나이에 65세의 남자와 결혼했다. 그러나 남편의 딸과 불화로 고통을 겪었다. 결혼 11년 만에 남편이 죽었고, 그녀는 홀로 작품활동을 펼치다가 1995년 사망했다. '색, 계'를 비롯해 '해후의 기쁨' '흘러가는 꽃' 등 많은 작품이 미국으로 건너간 이후 쓴 글들이다. 작품 대부분은 '여성의 인생'에 관한 것들이다.

소설 '색, 계'의 소재는 그녀의 첫번째 남편 후란청을 통해 얻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평론가들이 여러 가지 근거를 들어 그렇게 말하고 있다. 그러나 작가 장아이링은 '색, 계'의 소재를 전 남편을 통해 얻었다고 직접 밝힌 적은 없다고 한다.

'색, 계'는 짧은 소설이지만 오래 썼다. 50년대에 집필을 시작, 거의 30년에 걸쳐 고치고 다듬기를 반복했다고 전해진다. 그녀의 소설집 '색, 계(랜덤 하우스)'가 국내에 출간됐는데 '색, 계'를 비롯해 7개 단편소설로 구성돼 있다.

조두진기자 earful@msnet.co.kr

△ 장아이링(張愛玲·1920∼1995)=중국 상하이 출생. 소설가이자 영화작가로 활동했다. 역사와 관습, 남성 사이에서 비극적 삶을 살 수밖에 없었던 중국 여성들의 삶을 그리고 있다. 주요 작품으로 '연환투' '열여덟의 봄' '앙가' '붉은 땅의 사랑' 등이 있다. 그녀의 소설 중 '원녀' '반생연' '레드 로즈 화이트 로즈' 등이 영화화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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