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혹 동화를 보다 보면 오싹해지는 느낌을 받는다.
성에 갇힌 라푼젤이 긴 머리카락을 내려뜨리는 장면은 머리를 산발한 채 TV 밖으로 나오는 스즈키 코지의 '링'이 연상된다. 유리 구두에 발을 맞추기 위해 뒤꿈치를 잘라내는 '신데렐라'는 엽기 잔혹극 '쏘우'가, 배신당한 후 밤마다 공주의 문을 두드리는 '개구리 왕자'는 '13일의 금요일'이 떠올려지기도 한다.
그러고 보면 팀 버튼이 만든 '스위니 토드'나 길예르모 델 토로의 '판의 미로'도 모두 잔혹동화의 범주에 들어갈 동화 같은 이야기다.
동화 같다고 하면 '옛날 옛적에'로 시작해 '그리고 둘은 행복하게 살았답니다'로 끝나는 해피엔딩의 판타지 동화를 떠올린다. 혜성같이 나타난 왕자의 불꽃 같은 사랑으로 저주가 풀려나 알콩달콩 행복하게 살아가는(happily ever after) 결말이 동화의 전형이다. 그림형제 등 동화의 원작에서 보이는 잔혹을 도려낸 채 달착지근한 환상으로만 채색된 동화는 현대에 들어 출판업자가 만들어낸 환상 동화들이다.
이번 주 개봉한 '페넬로피'는 전형적인 동화의 형식에 전형적인 디즈니식 콘셉트로 만들어진 영화다.
가문의 저주로 돼지코를 갖고 태어난 귀족 집 무남독녀 페넬로피(크리스티나 리치). 세상과 격리된 채 대저택 안에서만 25년을 살아왔다. 물론 이 저주를 풀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같은 피'를 가진 남자를 만나 진정한 사랑을 나누는 것이다.
어머니(캐서린 오하라)의 극성으로 귀족들이 줄을 서지만 그녀의 얼굴을 본 순간 모두 기겁을 하고 달아난다. 이 가문과 오랜 원한을 가진 기자가 특종 취재를 위해 노름빚에 시달리는 귀족 맥스(제임스 맥어보이)를 후보로 잠입시킨다. 그러나 페넬로피를 만난 후 사랑을 느낀 맥스는 알 수 없는 이유로 떠나고, 상심한 페넬로피는 처음으로 자신의 방을 떠나 낯선 도시의 거리로 나온다.
이 영화의 배경은 영국인지 미국인지 모호하게 나온다. 시대도 알 수 없다. 오르골의 동화적인 멜로디와 '원스 어폰 어 타임'(옛날 옛적에)이란 자막으로 시작해 마녀도 나오고, 저주도 나온다. 현대 동화라는 것을 뚜렷하게 강조한 대목이다. 저주로 들창코를 넘어 완전한 돼지코와 돼지귀의 공주가 태어난다는 메인 설정은 동화라는 콘셉트 속에서만 가능할 일이다.
25년간 사육되다시피 커 온 페넬로피는 라푼젤처럼 절망하지 않고 프랑스어 등 각종 언어와 악기를 다루는 다재다능한 규수로 자라나고, 생전 처음 나선 도시지만 세련되게 행동하는 것도 그렇다.
동화를 두고 '맞다' '아니다'를 얘기하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다. 다만 얼마나 그럴싸한 이야기로 만들어졌느냐는 것이 문제다. 페넬로피의 돼지코는 누구나 가지고 있을 약점에 대한 상징이다. 뜯어고치고 싶은 한 부분이다. 영화처럼 저주가 순식간에 풀리면 얼마나 좋을까마는 현실은 그렇지가 못하다. 차라리 '슈렉'에서처럼 그 약점을 껴안았다면 더 좋았을 것을, 현대적으로 재해석되지 못하고 동화의 전형 속에 갇힌 점이 아쉽다. 당도 100%를 지향하는 할리우드의 집착 때문이 아닐까.
그러나 배우들의 호연으로 캐릭터의 구성은 세련되게 짜여있다.
페넬로피 역으로 나온 크리스티나 리치는 돼지코를 하고 있지만 머플러로도 가릴 수 없는 귀여움과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특히 어머니로 나온 캐서린 오하라는 팀 버튼의 '비틀 쥬스'에 이어 호들갑스런 어머니 역을 잘 소화하고 있다. 직접 제작도 맡은 '금발이 너무해'의 리즈 위더스푼이 도시로 모험을 떠나 만난 페넬로피의 왈가닥 친구로 나온다.
미국 개봉시 평론가들은 리즈 위더스푼이 돼지코였다면 더 창의적이고 코믹했을 것이라는 평을 내놓았지만, 크리스티나 리치의 매력도 만만찮다. '어톤먼트'에서 맺어질 수 없었던 사랑에 가슴 아파했던 제임스 맥아보이는 들뜬 다른 캐릭터와 달리 차분한 연기로 스크린의 균형을 잡고 있다.
많은 로맨틱 코미디가 그렇듯 동화적 환상으로 본다면 달착지근한 '페넬로피'의 매력도 그리 나쁘게 보이지는 않는다. 25년간 갇혀 지낸 괴물보다 동화 같은 돼지코 아가씨가 낫지 않을까. 89분. 12세 관람가.
김중기기자 filmtong@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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