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복거일의 시사코멘트] 품위를 지니고 마감하는 삶

지금 생물학은 생명 현상을 깊이 이해할 수 있는 수준에 이르렀다. 그러나 그런 이해는 아직 병들과 노화로부터 우리를 지켜줄 만한 의료 기술로 구체화되지 못했다. 그래서 목숨을 가까스로 연장시킬 수는 있지만 건강을 돌려주지는 못하는 의료 기술들이 많이 쓰인다.

이런 사정은 한 세대 전에는 볼 수 없던 독특한 풍경을 낳았다. 안락사에 관한 논란은 그런 풍경의 한 부분이다. 며칠 전엔 인공호흡기로 연명하는 어머니의 치료를 병원이 중단해야 한다고 자식들이 법원에 가처분 신청을 했다. 지금 우리 법은 소생할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는 환자의 인공호흡을 중단하는 조치를 살인이나 살인방조로 규정한다.

품위를 지닌 채 삶을 마감하는 것은 모두가 절실히 바라는 바다. 혼수 상태에서 기계에 의존해 겨우 죽지 않은 상태로 남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의식은 있어도 몸을 제대로 가눌 수 없거나 고통이 너무 큰 경우에도, 사람들은 삶을 편히 끝내고 싶어한다.

우리 사회의 원리인 자유주의에 따르면, 개인들의 그런 판단을 막은 것은 옳지 못하다. 개인이 자신의 삶을 어떻게 꾸려가느냐 하는 것은, 도덕과 법에 어긋나지 않는 한, 온전히 그의 몫이다.

안락사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으레 '생명의 존엄성'을 내세운다. 그럴 듯하게 들리지만, 안락사가 생명의 존엄성을 해친다는 주장은 근거가 없다. 의식을 잃고 기계에 의존해 죽음을 겨우 막아내는 사람은 온전한 사람이 못 된다. 그런 처지에 놓였을 때 품위를 지니고 삶을 마감하겠다는 욕망 어디에 생명의 존엄성을 해치는 뜻이 담겼는가?

말기 병을 앓는 환자들이 치료비를 줄이기 위해 일찍 자살하라는 압력을 가족으로부터 받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이것은 정당한 걱정이지만, 환자가 어떤 시점에서 생명 연장을 중단하기를 바라는지 밝히는 '생명 유언(living will)'이 관행으로 자리잡는다면, 오용은 많이 줄어들 것이다.

안락사는 사회적으로도 바람직하다. 노인들의 의료 비용은 죽기 몇 주일 동안 생명을 억지로 연장하는 데 대부분 들어간다. 그런 비용은 투자 가치가 높다고 보기 어렵다. 그리고 그런 비용은 대체로 큰 병원들의 수입이 되므로, 큰 병원 종업원들에게로 소득을 이전한다. 의사를 비롯한 병원 종업원들의 소득이 높으므로, 그런 소득 이전은 정당화되기 어렵다.

한 세대 전 서양에서 안락사가 중요한 사회적 논점이 되었을 때 주목받은 과학소설 작품 하나는 살 만큼 산 사람이 가깝게 지낸 사람들을 불러 잔치를 연 다음 그들과 작별하고서 혼자 안락하게 죽음을 맞는 모습을 그렸다. 그런 세상을 떠올리면, 목월의 '蘭(난)'이 저절로 떠오른다.

이쯤에서 그만 하직하고 싶다.

좀 여유 있는 지금, 양손을 들고,

남어지 허락 받은 것을 돌려 보냈으면.

다른 일들에서와 마찬가지로, 삶을 마감하는 일에서 선택의 폭이 늘어나는 것은 개인들의 복지를 늘리고 사회를 발전시킨다. 여유있을 때 허락받은 것을 돌려보내고 싶은 사람들이 그렇게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은 우리 삶을 보다 낫게 만들 것이다.

복거일 소설가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