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孝)와 의(義)! 유교 정신이 투철했던 시대에는 첫손에 꼽히던 덕목들이었다. 그러나 물질을 중시하는 세상이 되면서 효와 의는 크게 빛이 바래고 말았다. 부모를 정성껏 봉양하기는커녕 성년이 된 후에도 부모에게 삶을 의지하는 '캥거루족'이 드물지 않고, 의로움을 실천하는 이들도 찾아보기 힘들다. 역설적으로 세상이 이렇게 됐기에 효와 덕의 가치는 더욱 빛이 날 수밖에 없다.
남서쪽으로 가야산을 품은 성주 땅에는 효와 의를 몸소 보여준 이들이 너무나 많다. 우리가 효와 의를 실현한 이들을 찾아 나선 까닭은 빛이 바랜 효와 의를 조금이나마 되살려 더불어 사는 세상을 만드는 데 다소나마 보탬이 될까 하는 마음에서다.
하늘이 감동한 효행!
어버이날이 있는 5월이면 자주 회자(膾炙)되는 사자성어가 있다. '풍수지탄(風樹之嘆)' 또는 '풍목지비(風木之悲)'란 말이다. 효도를 다하지 못한 채 부모를 잃은 자식의 슬픔을 가리키는 말이다. "무릇 나무는 조용히 있고자 하나 바람 잘 날이 없고(樹欲靜而風不止), 자식이 부모를 모시고자 하나 부모는 이미 안 계시다(子欲養而親不待)"는 말에서 이들 사자성어는 유래됐다. 부모가 살아계실 때 효도를 다하라는 뜻이 담긴 이들 사자성어는 일년 내내 가슴에 담아둬야 할 명문이지만 5월이면 더욱 가슴에 와닿는다고 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대구에서 30번 국도를 따라 성주읍으로 가는 길. 낙동강을 가로지르는 성주대교를 건너 5분 정도 더 달리면 오른쪽으로 박구효자정려비(朴矩孝子旌閭碑)가 보인다. 도로가에 바로 붙어 있어 쉽게 찾을 수 있다. 이 정려비(선남면 도성리)는 조선 전기 효성이 지극해 세상에 널리 알려졌던 동천(東川) 박구(朴矩)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세운 것. 개성부윤을 지낸 박원택의 둘째 아들로 태어난 박구는 태종과 세종 때에 강원도병마도절제사, 경상도수군도안무처치사, 좌군총재 등을 역임한 인물. 그 벼슬보다도 지극한 효성으로 이름이 매우 높았다.
어머니인 정부인 이씨가 병환이 들자 그는 천지신명께 빌어 얼음 위로 뛰어오르는 잉어를 구했다는 전설을 남겼다. 또 눈속에서 복숭아를 얻어 병을 구완했다는 일화도 남아 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3년간 시묘살이를 하며 한번도 집에 들어가지 않았다. 나중에 이 같은 효행이 조정에 알려져 중종 30년(1535)에 조정에선 정려(旌閭)를 내리고 자헌대부 예조판서에 추증했다.
화강암으로 만들어진 정려비는 높이 110cm, 폭 49cm, 두께 14cm의 크기다. 정면에 '효자가정총제박구지려'라 새겨져 있다. 비를 보호하기 위한 비각은 정면 1칸, 측면 1칸 규모다. 이 비는 처음에는 남쪽인 백천가에 있었으나 홍수로 인해 침몰된 것을 광녕산 기슭으로 이전했다가 또다시 비바람으로 퇴락한 것을 1818년 지금의 장소에 비각을 건립하고 안치했다.
박구와 쌍벽을 이루는 성주의 효자가 김윤도(金潤道)다. 성주 금수면 광산리 면사무소 바로 옆에 그의 효행을 기리는 정려비각(旌閭碑閣)이 있다. 순천 김씨인 김윤도의 효행은 그에 관한 전설을 먼저 살펴보는 것이 합당할 것 같다.
효성이 지극한 김윤도는 연세가 많은 부친이 병환으로 몸져 눕자 병환이 완쾌돼 일어나게 해달라고 하늘에 극진히 기도했다. 그러나 효험이 없어 부친이 식음을 전폐하자 자신의 손가락을 잘라 그 피를 부친의 입 속으로 떨어뜨려 사흘을 더 살도록 했다. 그후 모친이 병으로 몸져 누워 한 의원이 병에는 비둘기가 좋다고 해 백방으로 구했으나 끝내 비둘기를 구하지 못해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하늘을 날던 비둘기가 갑자기 김윤도의 집으로 날아들더니 모친 방의 문틀을 받고 떨어져 죽었다. 이 비둘기를 지극정성으로 달여 모친께 드렸더니 병이 완쾌됐다는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그 타당성 여부를 떠나 김윤도의 지극한 효성을 엿볼 수 있는 이야기란 생각이 든다.
김윤도정려비각은 1904년 세워졌다. 전면 측면 각 1칸으로 팔작기와지붕이다. 건물 안에는 '효자학생순천김윤도지려'란 편액 1점이 걸려 있다. 좌측면에 상량문이 걸려 있고 비석의 좌대는 화강암으로 장방형이다. 비신은 보통 볼 수 있는 화강암으로 이수가 없이 상단을 둥글게 마감했다. 세워진 지 100년이 조금 넘었지만 정려비각은 다소 퇴색한 느낌을 준다. 시멘트로 발라 놓은 담장도 눈에 거슬리고, 앞에는 그 흔한 안내판도 없다. 김윤도의 효행을 통해 세상 사람들이 효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할 수 있도록 적절한 조치가 필요할 것 같다.
동제바위와 조산
30번 국도를 따라 성주댐을 지나 김천 증산 쪽으로 달리면 금수면 봉두리가 나온다. 안새출이라고도 불리는 마을이다. 이 부근에서 도로 왼쪽으로 보면 커다란 바위 하나가 눈길을 끈다. 동제바위다. 바위는 높이 4m, 가로 5m, 세로 3m 정도 크기의 장방형이다. 동제바위란 이름은 마을 주민들이 동제를 지낸 데서 유래됐다. 신기한 것은 바위 위에 자라는 소나무다. 척박한 바위틈에서 자란 것을 감안하면 소나무는 수령이 200~300년으로 추정되는 고목이다.
원래 이 동제바위 주변에는 커다란 조산(造山·돌무더기)이 있었다고 한다. 성주댐을 조성할 당시 없어졌다는 것. 이 조산과 관련된 흥미로운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조선 중기 이 마을에 사는 이씨 성을 가진 사람이 부산 동래부사를 제수받아 사또로 부임했다. 임지로 내려가보니 고을 백성들은 흉년에다 무거운 세금에 허덕이고 있었다. 그는 세금을 감면해주고 빈민을 구제하는 등 선정을 베풀었다. 또 탐관오리들을 없애고 백성들을 잘 살게 해 주민들은 그 선정에 대한 보답으로 공덕비까지 세웠다는 것이다.
그후 동래부사를 역임한 이 사람이 세상을 떠나자 성주의 동네 사람들은 매우 슬퍼하며 장례를 치르려 했다. 하지만 장지로 택한 곳이 산세가 악한 곳이라 성처럼 축대를 쌓아야 했다. 축대를 쌓으려면 많은 돌이 필요하고, 또 돌을 운반해야 하는 거리도 매우 멀었다. 작은 동네라 인부도 넉넉지 못해 주민들은 큰 걱정을 하고 있었다. 하는 수 없이 장례를 치른 후 축대를 쌓기로 결정하고 상여를 운구해 장지에 오니 동네 사람도 아닌 많은 이들이 장사진을 이뤄 돌을 나르고 있었다. 그 중에는 아녀자들도 섞여 있었다. 동네사람들이 매우 궁금해하며 어디에서 온 사람들이냐고 물었더니 "우리는 동래부중에서 왔소이다"고 대답했다. 이어 "우리 사또께서 동래부사로 부임하셔서 우리들의 배고픔을 면하게 해주시고, 억울함을 풀어주시는 선정을 베푸셨으니 우리들이 가서 그분이 가시는 마지막 길을 도와야 하지 않겠느냐고 의논이 되어 이렇게 와서 일을 하고 있다"고 했다. 그들이 열심히 일을 한 덕분에 해질 무렵에 축대가 완성됐고, 축대를 쌓고 남은 돌을 바위 옆에 모으니 큰 조산이 되었다는 이야기다. 그래서 그때부터 마을에서는 이 곳이 의미 있는 곳이라 하여 장승을 세우고 바위에서 동제를 지냈다고 한다. 백성을 위해 선정을 베푼 한 선비와 그 은혜를 잊지 않고 갚은 백성들이 만들어낸 한 편의 아름다운 이야기에 마음이 숙연해진다.
글·이대현기자 sky@msnet.co.kr 박용우기자 ywpark@msnet.co.kr 사진·박노익기자 noik@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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