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승당 왼편을 돌아 한산정으로 내려섰다. 한산도 앞바다가 눈앞에 펼쳐졌다. 여기는 통제사가 활을 쏘았던 곳으로 추정되는 활터이다. '난중일기'에 가장 빈번하게 나오는 내용은 통제사가 아프다는 기록과 통제사 혼자 또는 동료 장수들과 활을 쏘았다는 기록이다. 또한 1594년 4월에는 한산도 진영에서 활을 쏘는 것만으로 무과시험을 치를 수 있도록 허락을 얻어 1백여 명의 병사들을 과거에 합격시키기도 했다. 하지만 이곳 역시 옛 흔적은 전혀 남아있지 않아 정말 이곳이 그 활터였는지는 증명하기는 어렵다. 사대와 과녁 사이에 바닷물이 들어와 있는 풍경이 퍽이나 아름답고 이채롭다. 사대 자리에 세워진 '한산정'이라는 정자는 그 시절에 복원된 많은 옛 건물들이 그러하듯 전체가 시멘트로 지어진 건물이다. 이러한 건물은 오히려 상상력을 가로막는다. 멍하니 그 자리에 서서 통제사의 마음을 다시 생각했다. 통제사는 저마다 울음을 우는 적의 개별성을 슬퍼했다. 왜 저마다의 울음을 우는 개별성의 몸이 자신의 칼로 죽여야 하는 적이 되어야 하는지를 슬퍼했다. 개별성을 지닌 적은 이미 적이 아닐 수도 있었다. 단지 연민의 대상일 수도 있었다.
나의 적은 전투 대형의 날개를 펼치고 눈보라처럼 휘몰아 달려드는 적의 집단성이기에 앞서, 저마다의 울음을 우는 적의 개별성이었다. 그러나 저마다의 울음을 우는 개별성의 울음과 개별성의 몸이 어째서 나의 칼로 베어 없애야 할 적이 되어야 하는 것인지를 나는 알 수 없었다. 적에게 물어보아도 적은 대답할 수 없을 것이었다….부대를 잃고 퇴로를 잃은 적들은 갯벌의 바위틈이나 물고랑에 게처럼 모여서 울었다.(김훈, '칼의 노래' 부분)
다시 제승당 앞으로 올라왔다. '수루'가 보였다. 통제사가 '큰 칼 옆에 차고 깊은 시름 하던'모습이 떠올랐다. 한산도 앞바다의 풍경이 그림처럼 내려다보였다. 자신을 둘러싼 안과 밖의 수많은 적들 속에서도 나라를 위해 그 자리를 지켜야 했던 통제사의 번민이 절절하게 가슴으로 다가왔다. "이날 저녁 달빛은 대낮같고 바람 한 점 없는데 홀로 앉아있으니 심란하여 잠을 이루지 못하겠다. 잠을 이루지 못해 신홍수를 불러 퉁소를 불게 하다.(이순신, '난중일기' 부분)"와 같은 묘사가 저절로 나올듯한 풍경. 수백 년 전에 화약 연기와 피비린내가 진동했던 한산도 앞바다는 이제 아름다움 그 자체이다. 승리의 역사도 아픔의 기억도 시간이 모든 것을 지워버린다. 그 시간의 자취를 담은 이야기만이 빈 바다를 맴돈다. 쓸쓸했다. 일군의 여행객을 앞두고 지방 문화해설가 한 분이 한산도 대첩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었다. 수루 난간에 앉아 한산도 앞바다를 내려다보았다. 거북 등대가 손에 잡힐 듯 다가오면서 거북의 입에서 연기가 품어져 나오고 장검을 든 통제사의 '방포하라!'는 소리가 귀를 파고들었다. 평소에 정말 좋아하는 통제사의 시를 읊조렸다.
天步西門遠(나라님 행차는 서쪽 관문으로 멀어지고)/東宮北地危(동궁전하는 북쪽 변경에서 위험에 처해 있다)/孤臣憂國日(외로운 신하 나라 일 걱정하는 날)/壯士樹勳時(장사들은 공을 세울 때이다)/誓海魚龍動(바다에 맹세하니 어룡이 감동하고)/盟山草木知(산들에 맹서하니 초목이 안다)/讐夷如盡滅(이 원수들을 다 죽일 수 있다면)/雖死不爲辭(비록 죽을지라도 사양하지 않으리)
바다에 맹세하니 어룡이 감동하고 산에 맹세하니 초목이 알아주는 그 맹세는 무엇이었을까? 당연히 그것은 적을 물리치고 조선과 조선의 백성들을 지키는 일이었을 게다. 충신이 단지 충신으로만 인정받을 수 없었던 불행한 시대를 살았던 통제사 이순신. 통제사의 번민이 단지 그 시대만의 번민이었을까? 결국 사람들이 살아가는 세상의 모습은 비슷하다. 세계 4대 해전 중의 하나인 한산도 대첩의 현장에서 오히려 통제사의 번민을 읽어야하는 내 마음의 흐름이 쓸쓸했다. 오랜 시간 아름다운 한산도 앞바다를 지켜보며 통제사와 대화를 했다. 그래도 결국 내가 돌아 가야할 곳은 내 삶이 그대로 숨 쉬는 일상이다. 반원을 그으며 제승당을 돌아 나오는 길이 다시 쓸쓸했다.
한준희(경명여고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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