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계산동에서] 지키지 못할 원칙의 충돌

"나도 원칙이 있는 사람이다."

한나라당 강재섭 대표가 지난 12일 부처님오신날 봉축법요식에 참석한 자리에 기자들이 몰려들자 손사래를 치면서 던진 말이다. 그는 자신이 대표로 있는 한 한나라당을 탈당, 총선에 출마해서 당선된 인사들을 입당시킬 수는 없다고 말했다. 탈당인사들이 '살아서 돌아오겠다'는 공약 아닌 공약(?)으로 한나라당 지지층을 파고드는 데 대해 '당선되더라도 받아주지 않겠다'며 받아쳤는데 한달여 만에 당초 입장을 번복할 수 없다는 뜻으로 들렸다.

이는 총선 후 친박인사들의 복당문제를 부여잡고 일괄복당을 내세우고 있는 박근혜 전 대표가 11일 출국하면서 "5월 말까지 결론을 내달라"고 압박하고 나선 데 대한 화답이자 불쾌감의 표시이기도 했다.

박 전 대표 측은 국민들이 보기에 짜증이 날 정도로 박 전 대표가 복당문제를 고집하고 있는 것은 잘못된 공천에 따른 총선결과를 겸허하게 받아들이라는 '원칙의 문제'라고 주장하고 있다.

박 전 대표의 원칙과 강 대표의 원칙이 정면충돌하고 있는 모양새다.

강 대표는 이후 곧바로 원칙을 수정했다. 그토록 완강해 보이던 강 대표의 원칙은 이명박 대통령과 박 전 대표의 청와대 회동 이후 열린 최고위원회의에서 기존 입장을 거둬들이면서 사라졌다. 박 전 대표가 이에 대해 "종전 입장을 바꾼 것은 어려운 결정을 한 것"이라며 높이 평가할 정도였다. 물론 강 대표가 원구성 협상에 따라 친박인사들의 복당시기가 전당대회 이후로 될 수도 있다는 치밀한(?) 계산을 했는지도 모르지만 그가 원칙을 바꾼 것만은 사실이다. 바꿀 수 없는 것이 원칙이라지만 우리 정치판에서는 이처럼 수정되거나 뒤바뀌는 원칙도 있는 법이다.

당정분리 원칙 또한 그런 모양이다.

당정분리는 박 전 대표가 대표로 있던 지난 2005년 11월 홍준표 의원이 주도하던 당혁신위원회가 만들어낸 한나라당 개혁의 핵심적인 내용이었다. 당정분리에 따라 대선 후보와 당 대표의 역할과 권한이 분리됐다. 당시 노무현 대통령과 열린우리당이 먼저 당정분리를 실천하고 있었던 점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한나라당이 이번 공천을 이 대통령의 눈치를 보지 않고 독자적으로 했다고 믿는 사람은 없다. 이미 당정분리원칙은 깨졌다. 이 대통령 주변 사람 중에서는 아예 '당정일체'로 당헌을 바꿔야 한다고 공공연하게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박 전 대표는 총선 직전 가진 기자회견에서 김장수 전 국방장관 등을 비례대표로 영입했다고 보고하자 이 대통령이 칭찬을 했다는 강 대표의 언급을 들어 당정분리가 훼손됐다고 강하게 지적했다.

그렇다면 박 전 대표는 당정분리 원칙을 잘 지키고 있느냐 하면 그렇지도 않다. 박 전 대표 역시 이 대통령의 당무개입을 기정사실화하고 있는 것 같다. 청와대의 요청이 있었다고는 하지만 이 대통령을 만나 복당문제의 해법을 요구하고 나선 것은 스스로 당정분리 원칙을 깨뜨린 것이라는 지적을 받을 만하다는 지적이다. 그의 측근들이 청와대에 갔는데 아무런 선물이 없었다고 지적하고 나선 것이나, 청와대 참모들이 이에 당 대표직을 제의했다고 발끈한 것 모두 당정분리라는 원칙을 무시한 '실세'들끼리의 농단이라는 비난을 받을 만하다.

박 전 대표의 한 측근은 이와 관련, "당정분리 원칙이 지켜지고 있다면 이 대통령에게 (친박인사)복당에 대한 개인적인 의견을 물을 필요가 없었다"며 "(박 전 대표는)현실적으로 접근한 것이지 당정분리 원칙이 훼손되고 있는 현실을 인정하겠다는 뜻은 아니라고 본다"고 해명했다.

당정분리 원칙은 강 대표가 대표직을 물러나는 7월 이후 완전히 무너질 것 같다. 차기대표 물망에 오르는 박희태 의원에게는 '관리형'이라는 수식어가 붙는다. 당 대표가 누군가의 관리를 받으면서 '눈가리고 아웅거릴' 것이 아니라 이참에 아예 당헌을 바꿀 것을 권고한다.

서명수 정치부 차장 diderot@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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