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야구 투수 성준을 생각하면 떠오르는 느낌은 어떤 것일까.
지겹도록 긴 투구 간격이 아닐까? 성준이 포수와 사인을 교환하기 시작하면 화장실에 다녀와도 볼 카운트가 변하지 않았다. 화장실에 다녀와 자리에 앉을 때까지 그는 1루 주자를 한번 바라보고, 로진백을 만지고, 포수와 사인을 주고받고, 모자를 만지고, 그러다가 다시 견제구 두어 번 던지고, 심호흡하고, 다시 포수와 사인을 주고받고…. 그의 긴 투구간격에 심지어 홈팀 관중 사이에서도 야유가 터지곤 했다. 그랬거나 말거나 성준은 느릿느릿 던졌다. 확실히 성준은 매력적인 투수는 아니었다.
프로야구 출범 직전인 1981년. 당시 고교 야구의 인기는 요즘 프로야구의 인기보다 못하지 않았다. 그해 3학년 성준이 이끄는 경북고는 '메이저급 전국 고교야구 대회' 우승컵 4개 중 3개를 차지했다.
그럼에도 성준은 '톱 라이트'를 받지 못했다. 메이저급 대회를 휩쓸었지만 사람들은 성준을 '2인자'로 생각했다. 그의 재능이 부족했기 때문도, 재능을 증명하지 못했기 때문도 아니었다. 누구 탓도, 무슨 이유도 아니었다. 다만 인생이었다. 그 해 메이저 고교야구대회 4개 중 3개를 거머쥔 성준에게 2인자 대접은 야구의 문제가 아니라 인생의 문제였다. 성준보다 야구를 조금 더 잘했던 박노준 때문이었다.
성준은 박노준에게 패하지 않았다. 1981년 청룡기 결승에서 경북고는 연장 접전 끝에 박노준의 선린상고를 무너뜨렸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이를 '이변'으로 여겼다. 박노준이 이겼더라도 그랬을까? 박노준이 이겼더라면 사람들은 '박노준이 강했다'고 간단히 말했을 것이다. 성준은 강함을 다시 증명해야 했다.
봉황기 결승에서 경북고와 선린상고는 다시 만났다. 결승에 오르기까지 경북고의 성준은 20이닝 동안 단 1점도 내주지 않았다. 그러나 선린상고와 마주한 결승전에서 성준은 1회부터 난타당했다. 팀을 결승에 올려놓기까지 팀 경기의 절반 이상을 던진 피로 때문이었다.
선린상고는 초반 공세를 퍼부었지만 이날도 경북고에 4대 6으로 패했다. 1회 말 6번 타자의 안타 때 홈으로 파고들던 2루 주자 박노준의 스파이크가 그라운드에 박히며 발목이 꺾인 것이다. 박노준은 득점을 올렸지만 병원으로 실려갔고, 이후 경기는 경북고로 기울었다. 성준은 이날 최우수투수의 영광을 차지했다. 그는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박노준에게만은 지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날 뉴스 때마다 되풀이 방송된 것은 성준의 우승소감이 아니라 박노준의 발목이 꺾이는 장면이었다. 성준은 승리하고도 '일등대접'을 받지 못했던 것이다.
대학에 입학해서도 성준은 '톱 라이트'를 받지 못했다. 선배 이상군과 후배 김종석 때문이었다. 프로야구에 입단할 때도 그는 박노준, 김건우, 윤학길에 이어 '2인자 대접'을 받았다.
성준은 14년 동안 프로 무대를 지켰다. 그는 해마다 100이닝 이상을 던졌고, 컨디션이 좋을 때 2점 대, 나쁠 땐 3점대의 꾸준한 성적을 기록했다. 14년 동안 경기당 3.32점만 허용했고, 97승을 기록했다. 그는 기복 없는 공을 뿌렸다. 그는 틀림없이 에이스였지만 김시진, 박충식, 김상엽으로 이어지는 삼성의 '에이스 계보'에 끼지는 못했다. 한 사람의 1인자가 사라지면 또 다른 1인자가 성준 앞에 나타났다.
성준은 이른바 '천재'가 아니었다. 그래서 그는 천재들처럼 인생의 길을 함부로 내딛지 않았다. 성준은 압도적 구위로 '칠 테면 쳐 보라'며 공을 뿌려댄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마음만 먹으면 언제라도 삼진 아웃을 잡아낼 수 있는 투수가 아니었다. 그는 분탕질하다가도 정신만 차리면 언제든 정상에 설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불펜에서 몸만 풀고 있어도 상대 타자들이 초조해하는 투수는 더욱 아니었다.
그래서 성준은 조심스럽게, 지루하게, 상대의 리듬이 흐트러지는 순간을 기다렸다. 그는 그렇게 14년 동안이나 마운드를 지켰다. 130km대의 느린 직구를 가진 그가 할 수 있는 방법은 그런 것이었다. 성준의 공을 쳐내지 못하고 돌아서던 타자들은 흔해빠진 삼진 아웃을 또 한번 당한 표정이 아니라 '인생의 쓴맛을 본 사람 같은 표정'을 지었다. 성준의 공에는 확실히 '인생의 쓴맛'이 실려 있었다.
관중은 성준을 '최고'로 기억하지 않지만 그는 자신의 일을 제대로 했다. 그는 '절대최강'이 아니었지만 언제나 강자였다. 그가 등판하는 경기는 스포츠의 속성인 화려함이나 환호 대신 눅눅함과 고독이 묻어 있었다. 그는 '사내'답게 공을 뿌리는 대신 '아버지'처럼 조심스럽게 던졌다. 성준이 서 있던 자리가 마운드가 아니라 지난한 인생길처럼 보이는 이유였다.
조두진기자 earful@msnet.co.kr
댓글 많은 뉴스
국힘 김상욱 "尹 탄핵 기각되면 죽을 때까지 단식"
[정진호의 매일내일(每日來日)] 3·1절에 돌아보는 극우 기독교 출현 연대기
[단독] 경주에 근무했던 일부 기관장들 경주신라CC에서 부킹·그린피 '특혜 라운딩'
민주 "이재명 암살 계획 제보…신변보호 요청 검토"
김세환 "아들 잘 부탁"…선관위, 면접위원까지 교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