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돌아봐도 코미디가 따로 없다. 잘해놓고 도리어 싹싹 빌었으니. 2004년 당시 이명박 서울시장 얘기다. 시내버스를 혁명적으로 개선한 지 나흘 만인 7월 4일 그는 중죄나 지은 사람처럼 서울시민 앞에 엎드렸다. "불편과 심려를 끼쳐드려 죄송합니다." 하루아침에 바뀐 교통 흐름에 생난리를 치자 견디다 못해 사과 기자회견을 한 것이다. 시원스런 버스전용 중앙차로, 버스'지하철 환승이 편리하다는 것을 시민들이 깨친 것은 한참 뒤의 일이다. 40개 나라에서 서울을 배우러 왔다 가고 버스 이용객이 넘치는 지금 보면 보통 웃기는 해프닝이 아닌 것이다.
그때 소동은 우리 시민의식이 아직 멀었다는 씁쓸한 뒷맛을 남겼다. 이 시장한테도 문제가 없는 건 아니었다. 정책 예견 기능의 부재가 그것이다. 버스 개혁은 1천만 거대도시의 교통흐름을 통째 바꾸는 일이었다. 일시적으로 우왕좌왕할 게 뻔했다. 그렇다면 예상 가능한 모든 혼란 유형을 상정해 정교하게 대처했어야 마땅했다. 궁극적으로 누릴 시민편의를 알아듣게 하고 그때까지 불편을 감수해 달라는 홍보학습 기회를 가졌어야 한 것이다.
'쇠고기 소동'이 그 짝이다. 이 대통령은 미국 쇠고기 반대가 광우병 쪽으로 굴러갈 줄 생각도 못했다고 했다. 한우 농가 대책 논란만 예상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한미 FTA 반대자들이 들쑤셨다고 원망했다. 말은 맞다. 소동의 중심에는 분명 특정세력이 있다. 반미주의자, FTA반대자들이 광우병 괴담으로 몰고 가 평지풍파를 일으켰다. 누가 봐도 좌파에게 미국 쇠고기는 더없이 좋은 먹잇감이다. 정권을 뺏긴 야당이 옳다구나 달려들 건 말할 것도 없다. 극렬한 FTA 반대세력은 진작부터 쌍지팡이를 짚던 터다. 그렇다면 이들이 광우병보다 더한 난리를 칠 거라는 건 간단하게 예상할 일이었다.
시장 개방은 무역으로 먹고사는 나라에서 피할 도리가 없다. 너무나도 초보적인 경제상식이다. 촛불집회에 몰려나온 어린 학생들에게 이게 통했나. 시장 개방의 불가피성을 일반국민은 얼마나 인식하고 있나. 더더구나 쇠고기 수입 같은 예민한 부분은 그러한 사정을 이해시키는 여론 군불부터 때는 게 순서다. 그렇게 해도 국민적 동의가 쉽지 않을 문제다. 지난 정권이 질질 끈 이유도 다 그 때문 아닌가. 덜컥 도장부터 찍고 농가 걱정만 머릿속에 있었다는 대통령 말이 한가하게 들리는 까닭이다.
인사 또한 그렇다. 고위공직자들이 재산문제로 가장 많이 얻어터지는 나라가 이 나라다. 부자에 대해 가자미눈부터 뜨고 보는 국민정서 탓이다. 옳으냐 그르냐는 나중 얘기다. 대통령 자신도 혹독하게 당해보지 않았나. 그런데도 대통령은 '강부자' 일색으로 장관을 뽑아놓고 '베스트 중 베스트'라고 자랑했다. '재산 많은 게 죈가. 일만 잘하면 그만이지'하는 자기편향에서 판단한 것이다. 국민정서에 무신경한 외눈박이 인사는 결국 새 정권의 인상을 흐려놓았다.
이 대통령의 예견 기능 부재는 몸에 밴 CEO 체질을 벗지 못했기 때문이다. 기업 경영은 단순세계다. CEO는 판단하고 직원은 따라가면 그만이다. 목표를 향한 일사불란이 생명이다. 국가경영은 다르다. 모든 정책은 반대와 견제가 입을 벌리고 있다. 복잡한 이해관계와 이념이 얽히지 않은 정책은 없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사안이든 수립과 집행 과정에서 사회적'정치적 갈등은 필연적이다. 지도자가 고도의 예측'조정 능력을 놓치면 불필요한 갈등까지 떠 안기 십상이다. 지도자가 여론을 옆에 끼고 가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 대통령은 이 점을 간과해 혼이 나고 있는 것이다.
이 대통령은 긍정의 힘을 역설한다. 부정적으로 생각하면 될 일도 안 된다는 것이다. 자신의 성공신화가 생생한 배경이다. 하지만 나랏일은 긍정적인 쪽만 보고 돌진해서는 성공하기 어려운 법이다. 내키지 않더라도 부정의 한쪽을 살피며 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국민과 보폭을 맞출 수 없다. 정치의 기본이다.
오늘 이 대통령은 취임 석 달 만에 머리를 숙였다. 대국민 '사과'는 외눈박이 리더십을 돌아보는 깨달음이어야 한다. 이 시점을 계기로 대통령의 시력이 균형을 찾기 바랄 뿐이다.
김성규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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