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영화, 詩·그림을 만나다] ⑪살인의 추억

추억은 '희미한 옛 사랑의 그림자'처럼 아스라한 것이다.

그런데 '살인'의 '추억'이라니. 살인을 아련한 추억의 대상물로 여길 수 있는 것인가. 그러나 '살인의 추억'은 살인이 아니라 그 시대를 추억한 영화다.

연쇄살인, 그것도 붉은 옷의 여인만 골라 성폭행하고 잔인하게 살해하는 엽기를 통해 80년대의 저주를 그려내고 있다. 그 저주는 바로 성(性)이다. 비처럼 쏟아져 모두를 적신 성과 폭력이다.

알다시피 1980년대는 성의 홍수시대였다. 섹스와 스포츠, 스크린이란 3S 정책은 국민들을 마비시켰다. 특히 섹스와 스크린이 결합된 영화는 당시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다. 극장마다 희대의 성인물 '엠마뉴엘'의 아류작들이 내걸리고, 성에 목마른 여인과 이를 탐하는 수컷들의 아귀다툼이 당시 한국영화의 주된 스토리였다.

간혹 음모가 노출된 영화들도 실수를 가장(?)해 개봉되기도 했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채 음모를 드러낸 실비아 크리스텔의 모습을 은밀한 여관방이 아니라 대중이 함께하는 극장에서 본다는 것, 그것은 이성을 마비시키기에 충분한 일이었다.

화성 연쇄살인사건은 그 언저리에 터진 사건이다. 성에 마비된 채 침 흘리는 사회 한쪽에서 말없이 죽어간 빨간 옷의 원혼들, 그들의 저주가 바로 '살인의 추억'이다.

'살인의 추억'은 살인사건을 소재로 하면서 그 시대의 저주를 끄집어내고, 나아가 그 시대의 폭력성을 얘기하는 영악한 영화다. 데모하는 여대생을 발길질하던 조 형사가 못에 찔려 그 다리를 잘라내야 하는 지경에 이르는 장면은 어떤 식으로든 그 폭력을 응징하고픈 감독의 갈망이 담겨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살인'과 '추억'의 상반된 느낌은 '관능'과 '공포'와 유사하다. 관능은 늘 불안하고 위험하다. 섹스어필도 금지된 것에 대한 흥분이다. 관능은 아름다움을 파괴하려는 본능적인 심보로 인해 늘 공포와 함께 거론돼 왔다.

스릴러의 거장 알프레드 히치콕은 '새'의 티피 헤드렌, '현기증'의 킴 노박, '백색의 공포'의 잉그리드 버그먼 등 금발 미녀들을 살인자의 손에 넘기고는 그녀들이 고통받는 모습을 즐겼다. 그는 아름다움이 공포로 더욱 증폭된다는 심리를 잘 파악하고 있었던 것이다.

완전한 누드는 불안감을 동반한다. 사람들이 올 누드보다 조금은 가려진 누드에 더 섹스어필하고 관능적으로 느끼는 것도 그 때문이다. 성에 완전히 노출된 80년대의 공포가 그런 것이다.

누드화로 유명한 화가 이병헌은 '살인의 추억'을 본 후 빨간 치마를 벗는 여인의 누드를 그렸다. 이 그림 역시 관능보다는 불안하고 음울하고 슬픈 느낌이 더 든다. 빨간 치마는 최후의 양심마저 벗어던진 그 시대를 보여주고 있고, 칙칙한 배경은 어두운 밤, 빗속에 무서워 떨면서 옷을 벗어야 하는 여인의 공포심을 잘 드러내준다.

시인 박진형은 영화제목을 '추억의 알리바이'로 패러디했다. 빨랫줄에 걸린 살구색 브래지어와 붉은 팬티는 위험한 관능의 공포를 잘 이미지화하고 있다. 특히 울음이 삐져나오는 입술을 빨래집게가 모질게 물고 놓아주지 않는 모습은 죽음에 포획된 여인을 잘 그려주고 있다.

화성연쇄 살인사건은 끝내 미궁에 빠져 범인은 잡히지 않았다. 무성한 소문만 춤추는 너덜너덜한 퍼즐판이 되고 만 것이다.

'어떻게 생겼어/그냥 뻔한 얼굴인데/어떻게/그냥 평범해요'

범인은 그냥 뻔한 얼굴의 남자다. 도드라지지 않고 늘 우리 곁에 있는 옆집 아저씨 같은 사람이다. 평범한 그 사람은 그 시대를 살았던 우리 모두이고, 성에 미쳐 날뛰던 80년대이기도 하다. 실체 없는 생처럼 살아온 그놈이 곧 범인이다.

그래서 이 살인사건은 완벽한 알리바이가 성립되고, 시인은 그 알리바이를 추억하고 있다.

김중기기자 filmtong@msnet.co.kr

▨ 살인의 추억(2003)

감독:봉준호

출연:송강호, 김상경, 송재호, 박해일

러닝타임/등급:132분/15세 관람가

줄거리:1986년 경기도. 젊은 여인이 무참히 강간, 살해당한 시체로 발견된다. 2개월 후, 비슷한 수법의 강간살인사건이 연이어 발생하면서 일대는 연쇄살인의 공포에 휩싸인다. 구희봉 반장(변희봉 분)을 필두로 지역토박이 형사 박두만(송강호 분)과 조용구(김뢰하 분), 서울 시경에서 자원해 온 서태윤(김상경 분)이 배치된다. 육감으로 수사하는 박두만은 동네 양아치들을 족치며 자백을 강요하고, 서태윤은 사건 서류를 꼼꼼히 검토하며 사건의 실마리를 찾아가지만, 스타일이 다른 두 사람은 처음부터 팽팽한 신경전을 벌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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