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중구 달성동 자갈마당시장은 시장의 기능을 잃은 지 오래다. '자갈마당'이라는 이름 때문에 사창가와 관련된 곳이겠거니 생각하기 쉽지만 그런 것은 아니었다. 자갈마당과 멀진 않았지만 이곳 역시 흔한 우리네 소규모 재래시장 중 한 곳. 한때 이곳이 시장이었음을 알 수 있었던 것은 굳게 잠긴 상점 셔터들 사이에 드문드문 문을 열어둔 참기름 가게 덕분이다.
대낮에도 인적이 드문 골목은 자전거를 타는 꼬마들의 놀이터. 수연이(가명·11·여)는 친구의 자전거를 타며 골목과 소방도로를 누비는 게 가장 신난다고 했다. 초교 4년 여학생 평균신장(140cm 남짓)에는 못 미치지만 136cm의 수연이는 그래서 더 튼튼해보였다.
시장 골목 끝자락에 자리 잡은 수연이의 집은 휴대전화가 터지지 않는 곳이었다. 하지만 50㎡(15평)쯤 되는 이곳은 할머니 안경순(71)씨가 매달 15만원씩 내야 살 수 있는 곳. 기초생활수급자로 60만원 가까운 지원금을 정부에서 받지만 안씨는 "시장 부근에서 심부름 등으로 푼돈을 벌어 손녀 과자값이라도 보태야 한다"며 연방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오래 된 당뇨와 고혈압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아 안씨에게 차라리 덜 고통스러운 병이다. 그보다 2년전 치과 치료를 받은 뒤 찾아온 안면 통증은 왼쪽 귀를 멀게 만들고 왼쪽 눈꺼풀을 처지게 해 시력마저 대부분 뺏아갔다.
조손가정이 대개 그렇듯 수연이의 방은 따로 없었다. '자전거 타기와 컴퓨터가 가장 재미있다'고 하지만 자전거도, 컴퓨터도 없었다. 아니 컴퓨터를 놓을 공간도, 올려 둘 책상도 눈에 띄지 않았다. 수연이의 책상은 어린이집에서나 봄직한 유아용 플라스틱 책상. 그럼에도 스스럼없이 천진한 웃음을 짓는 수연이는 '밝고 명랑하며 친구들과 잘 어울리고 매사에 잘 해보려는 의욕이 넘치며 학습태도가 모범적인 어린이'라는 담임교사의 평과 비슷해보였다.
"나는 까막눈이라 통지표는 잘 모르겠고…. 친구들이 얼마나 많은지 몰라요, 만날 데리고 와."
안씨의 말에는 넉넉지 못한 살림과 조손가정이라는 주변의 시선에도 아랑곳않는 손녀에 대한 기특한 마음이 가득 배어 있었다. 하지만 말끝에는 그런 손녀를 제대로 뒷바라지해주지 못하는 자책감이 어쩔 수 없이 묻어났다.
"반에서 인기가 좋아?"라는 말에 고개를 끄덕끄덕거리는 수연이는 어른들의 선입견에서 자유로웠다. 오히려 할머니의 부담을 덜어주려는 모습이 '애어른'으로 비쳤다.
"반장에는 출마를 하지 않아요. 할머니더러 교통봉사를 하고 학교 일에 적극 나서라고 할 수는 없잖아요."
초교 4년생인 수연이에게는 변치않는 소원이 있다. 엄마, 아빠, 그리고 동생 미연이(가명·7·여)가 다시 모여 함께 사는 것이다. 이런저런 이유로 엄마, 아빠와 떨어져 살아온 지도 6년. 할머니의 건강이 악화돼 올해는 동생마저 외가로 보내야 했다. 하지만 수연이는 가족 넷이 모여 살던 행복했던 순간이 생생하다.
"엄마, 아빠가 지금은 멀리 있지만 다시 그런 날이 올 거라고 생각해요." 인터뷰 내내 웃음을 잃지 않던 수연이의 얼굴에 잠시 그늘이 비쳤다. 가족을 위해 늘 기도한다며 꼭 쥐는 성경책은 낡아 있었다. 매주 일요일, 그리고 가족들이 생각날 때마다 교회에 간다며 수연이는 이내 씩씩한 미소를 되찾았다.
김태진기자 jiny@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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