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야고부]전사자 명부

태평양전쟁 다큐멘터리를 TV로 보면서 가졌던 궁금증 중의 하나가 있다. 고립무원의 태평양 각 섬에서 죽어간 수많은 희생자들과 참혹한 전쟁의 실상을 과연 후세 사람들이 제대로 알고 기억할까 하는 점이다. 시간이 흐르고 유족들 가슴에 아픈 흔적이 남을지 모르지만 그들의 이야기는 결국 잊힐 것이라는 생각을 늘 해왔다. 그나마 전쟁을 경험한 사람들이 남겨 놓은 기억을 통해 간접적으로 전해 들을 뿐.

몇 해 전 김수환 추기경의 회고록에서 읽은 태평양전쟁 이야기에도 전후세대들이 피부로 느껴보지 못한 슬픈 사연들이 담겨 있었다. 일본에 적개심을 가진 조선 신학생이 사제가 되겠다고 일본에 유학 와서 전장에 끌려간 이야기를 구술한 것이다. "학병으로 징집돼 총검술 훈련을 받으면서 난감하기만 했다. 도대체 누굴 향해 쏘고, 찔러야 한단 말인가. 1944년 태평양 전선으로 끌려갔다. 다행히 전투가 벌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그냥 앉아서 전쟁이 끝나기를 기다릴 수만은 없었다. 동료 학병들과 배를 타고 은밀히 탈출을 시도했다. 하지만 우리는 유황도가 얼마만큼 떨어진 섬인지도 모르고 있었다. 무모한 계획이었다." 이 회고록에는 자신을 위해 기도하면서 눈물을 보이신 스승 게페르트 신부, 괌 전범재판 증언에 협조한 일 등 60년 전 전쟁의 기억들이 아스라이 담겨 있다.

억울하게 죽어간 희생자들을 모두가 잊고 있지 않다는 것을 최근 미국 수중탐사대의 한강 유역 수색에 관한 보도를 통해 알았다. 반세기를 훌쩍 넘겼지만 미국은 6'25 때 한강 작전에서 사망한 미군 유해를 찾기 위해 수중탐사대까지 보내 수색 중이라는 것이다.

어제 보도된 기쿠치 히데아키라는 일본인의 사연도 그렇다. 평범한 삶을 살아온 한 초로의 일본인이 10년에 걸쳐 태평양전쟁에 강제로 끌려간 조선인들이 언제, 어디서 사망했는지를 조사해 작성한 명부를 완성했다는 이야기다. 자신에게 불리하면 무엇이든 감추고 왜곡하는 일본에서 그것도 일본사람이 2만 명이 넘는 조선인 전사자들을 일일이 조사해 정리한다는 것을 상상할 수 있을까. 기존 명부에서 누락되고 중복된 것을 바로잡는 데만 10년이 걸렸단다.

기쿠치 씨의 명부는 호국보훈의 달 6월을 앞두고 잊힌 사람들에 대한 기억을 새삼 일깨워준, 끝나지 않은 전쟁의 이야기다.

서종철 논설위원 kyo425@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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