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식 입에 밥 들어가는 것과 내 논 물꼬에 물 들어가는 것만큼 보기 좋은 것이 없다'는 옛말이 있다. 쌀과 보리를 주식으로 했던 우리 민족으로서는 논이야말로 생명의 터전에 다름 아니었다. 따라서 좋은 논(上畓)을 얼마나 많이 가졌느냐가 곧 부의 척도이기도 했다.
그런데 쌀과 논에 관한 이 같은 애틋한 역사를 지닌 이 나라에서 식량자급률이 25%밖에 되지 않는다면 뭔가 잘못된 일이 아닐까. 그것도 쌀을 빼면 자급률이 고작 5%에 불과하다니….
한데도 유통매장마다 널린 게 쌀과 곡물이다. 지구촌에 곡물파동이 불거질 때마다 신문지상에 '식량안보'라는 말이 떠돌지만, 그리 절박하게 피부에 와닿지도 않는다. 그것이 바로 이 땅(논)에서 나는 쌀 덕분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우리가 세계적인 곡물쇼크의 여파에서도 이 정도나마 견뎌내고 있는 것은 주식인 쌀만큼은 상당 부분 자급을 유지하고 있는 저간의 사정 때문이다. 1993년 우루과이 라운드(UR) 협상 타결 이후 농산물시장 빗장이 열렸지만 쌀은 당분간 개방하지 않기로 한 덕을 톡톡히 보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전체적인 식량 자급률로 보면 우리는 먹을거리의 70% 이상을 외국에 의존하고 있다. 밥상의 태반을 남의 손에 맡겨두고 있는 꼴이다. 미국·유럽 등 주요 곡물 생산국들이 식량 패권주의를 강화한다면 우리도 그 회오리바람에 곱다시 말려들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래서 적정한 식량 자급률은 곧 국가안보의 개념과 직결되기도 한다. 혹자는 "농산물도 이제는 교역이 자유화된 상품인데 값싼 수입쌀을 사먹으면 될 것 아니냐"고 되물을 수도 있겠지만, 그런 생각은 식량안보라는 차원은 차치하고라도 논농사의 엄청난 공익적·환경적 기능을 고려하지 못한데서 비롯된다.
만약 논두렁이 없어져 여름 한철 물을 가두는 기능이 사라진다면 홍수 예방을 위해 그만큼의 댐을 건설해야 할 것이다. 여기에 자그마치 10조 원 이상의 예산이 필요하다고 한다. 벼가 지니고 있는 산소 정화작용은 또 어떤가.
이를 돈으로 환산하자면 족히 20조~40조 원의 가치는 될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여름밤 무논에서 들려오는 청아한 개구리의 합창과 가을철 황금들녘에서 얻는 정신적·문화적인 가치는 또 무엇으로 대체할 수 있을까.
언제부터인가 이땅에는 보리밭과 밀밭이 사라졌다. 겨울철 수많은 논밭을 놀리면서 사료는 대부분 수입을 하고 있다. 최근 국산 청보리가 외국의 수입사료보다 우수하다는 경북도농업기술원의 연구결과가 나온 적이 있다. 노는 땅을 활용해 사료 자급률을 높여야 한다는 메시지이다.
국제곡물가격이 치솟아도 미국과 유럽 호주와 같은 선진국들은 식량파동이 없다. 미국 쌀 농가 소득의 70%와 EU 농가 소득의 절반 이상이 각종 명목의 정부 보조금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프리카와 아시아 남미대륙의 개발도상국과 제3세계 국가들은 곡물파동이 올 때마다 온 나라가 휘청거린다.
3부작까지 가능한 쌀 생산국인 동남아의 여러 나라가 쌀 수입국으로 전락하는 것을 눈여겨봐야 한다. 개방화시대에 모든 것을 자급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겠지만, 농업은 경쟁력과 효율성이라는 경제논리만으로 접근해서는 안 된다.
그렇다면 우리 농업의 경쟁력은 어디서 찾아야 할까. 그것은 품질에 있다. 다소 비싸더라도 잘 팔리기만 한다면 그것이 최고의 경쟁력이다. 품질도 시대와 민족에 따라 기준이 다르다. 우리 한우가 값싼 미국산이나 호주산 쇠고기보다 경쟁력이 있는 것은 우리의 식습관 때문이다.
스테이크용이 아닌 구이용을 선호하는 우리의 미각이 한우의 경쟁력을 담보하고 있는 것이다. 원산지표시의무화와 한우생산이력제는 그래서 더욱 중요하다. 신뢰도 경쟁력이다. 이 땅에서 생산되는 유기농산물이라는 것을, 족보가 있는 한우라는 것을 믿을 수만 있다면 소비자들은 2~3배의 가격을 지불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다.
위기는 또 다른 기회이기도 하다. 오늘의 식량위기와 미국산 쇠고기 수입 파동을 우리 농축산업을 한 단계 끌어올리는 기회로 활용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 후손들의 건강과 미래를 위해서라도 안전한 식량과 밥상 확보는 결코 양보할 수 없다. 그래서 농자(農者)는 여전히 천하지대본(天下之大本)인 것이다.
조향래 사회2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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