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마다 5월이면 국립경주박물관에서는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문화재 그리기 빚기 대회'를 엽니다. 올해 벌써 24회째입니다. 지난 월요일이었습니다. 경주 포항 울산 등지에서 500명에 가까운 어린이들이 참가했습니다. 휴관일인 이 날은 아이들 천국입니다. 저마다 자기가 그리고 싶은 전시품 앞에서 옹기종기 모여 그림을 그리거나 찰흙으로 빚습니다. 어떤 아이들은 아예 전시실 바닥에 엎드려서 그립니다. 가까이 다가가 전시품을 꼼꼼히 살펴보고 다시 앉아 빚습니다.
여기저기 둘러보는데 여자 아이가 전시실에서 걸어 나오는 것이 눈에 띄었습니다. 나무로 된 커다란 화판과 물감 등이 무거워 보일 정도였습니다. 다가가 물었습니다. 몇학년이에요. 1학년이요. 근데 벌써 다 그렸어요? 네. 무얼 그렸는데요. … 몰라요. 아니 방금 그린 건데 생각 안나요? 그림에 제목 쓰지 않았어요? 썼는데요. 그림 그린 게 어떻게 생겼어요? 돌로 만들었어요. … 화석처럼 생겼어요. 화석이라고요?
얼른 무거워 보이는 화판을 들어주었습니다. 미안하지만 다시 한 번 네가 그린 것 앞으로 가볼까요. 아이를 따라 전시실로 들어섰습니다. 그것은 통일신라때 만든 석조선각불좌상(石造線刻佛坐像)이었습니다. 아이 키보다 훨씬 더 큰 부처님입니다. 편평한 화강암에 얕은 선으로 앉아 계신 부처님 모습을 조각한 것입니다.
아, 네가 부처님을 그렸구나, 이렇게 부처님께서 앉아 계신데 여기가 눈이고 여긴 입이지요. 아이가 끄덕였습니다. 그리고 나서 찬찬히 보니 아이 말처럼 화석 같아 보였습니다. 화강암 속에 화석처럼 들어가 앉아 계신 부처님. 부처님 화석이었습니다. 화석처럼 천여년이 넘도록 변치 않고 우리에게 전해지고 있는 불심(佛心)을 읽어 낸 듯했습니다.
대회 뒤 이루어진 심사 결과를 살펴보니 아이의 그림은 안타깝게도 수상작에 들지는 못하였습니다. 어제 낙선 작품 가운데 찾아 보았습니다. 모든 것은 다 생략하고 부처님 얼굴만 조그맣게 그렸습니다. 눈 코 입 등 얼굴을 비교적 정확히 연필로 묘사하고 크레파스로 붉게 칠했습니다. 뒤를 보니 석조선각불좌상이라고 또박또박 그림 제목을 적었습니다.
처음으로 이 부처님을 화석이라 깨닫고 그림으로 그 느낌을 나타낸 어린이는 경주에 있는 초등학교 1학년생입니다. 오늘 이 어린이 '작품'을 제 사무실 한 벽에 붙였습니다.
하나 덧붙입니다. 한 심사위원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고학년으로 올라 갈수록 솜씨나 기교는 좋아지는데 창의성은 점점 떨어집니다. 1학년 아이들 그림이 가장 창의적입니다. 왜 그럴까요.
이영훈 국립경주박물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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